순조로운 소개팅이었다. 그는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승진하고, 돈을 많이 벌어 처자식을 먹여살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아이는 셋쯤 낳고 싶고, 아내는 내조에 집중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말끝마다 책임감이 묻어났다. 마치 단단한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 그의 미래는 벌써 설계도가 완성된 듯했다. 그건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상적인 그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질감을 느꼈다. 그 순간엔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와 나 사이의 간극은 바로, '책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의미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의 차이였다.
그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 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찾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믿었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 그는 너무나도 '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누군가의 무언가로 불리기보다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삶, 나의 길 위에서 나로 살아가는 삶을 갈망했다. 내 질문으로 길을 찾고, 내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고 싶었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미지의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혼자라도 그 길 위에 서 있을 용기. 나는 그것을 지켜내고 싶었다.
정해진 틀 없이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흔들림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그 불안 속에서, 나는 나를 계속해서 알아가고 싶다. 무언가를 "해야 하니까"가 아니라, "왜 이걸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책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다. 다만, 나에게는 의미가 선행되지 않은 책임은 숨막힐 뿐이었다.
그날 나는 조용히 깨달았다. 좋은 사람과 나에게 맞는 사람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걸을 수는 없다는 것.
나는 나의 길 위에 함께 발 맞춰줄 사람을 원했다.
책임을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존중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내 의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궁금증에 함께 빠져들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안정된 미래가 보였을 테고, 내 눈에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여정이 아른거렸다.
누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다름을 통해 나를 더 선명히 보았다. 짝을 찾으러 나와, 나를 찾은 소개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