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의 원고를 읽은 지 일주일 후, 도민은 오랜 지인이자 문학 잡지 편집자인 정우와 만났다. 평소처럼 음악과 예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도민은 하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재능을 칭찬하며, 너무나 좋은 작품이라 정우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그럼 원고 좀 보내줘. 요즘 신인 작가를 찾고 있었거든."
도민은 잠시 망설였지만, 하윤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항상 자신의 글에 자신감이 없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이번 기회로 그녀의 재능을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하윤에게 미리 말하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거절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항상 "조금 더 다듬어야 한다"며 완벽해질 때까지 자신의 글을 숨기곤 했다. 도민은 이것이 그녀의 두려움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그는 하윤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그녀의 원고를 정우에게 전달했다.
며칠 후, 하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하윤 씨? 안녕하세요, '문학의 봄' 잡지 편집자 박정우입니다. 귀하의 단편 '양파의 법칙'을 읽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실을 작품을 찾고 있었는데, 관심 있으신가요?"
하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잡지사에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원고를 어떻게 보셨나요?"
"아, 도민 씨가 보내주셨어요. 오랜 친구거든요. 귀하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더라고요."
하윤의 얼굴이 굳었다. 통화를 마친 후, 곧바로 도민에게 전화했다.
"내 원고를 왜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거야?"
도민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웠다. "미안해, 하윤아. 난 그저 널 도와주고 싶었어. 네 재능이 너무 아까워서..."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야! 넌 내 허락도 없이 내 작품을 남에게 보여줬어!"
"하지만 좋은 기회잖아. 정우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네 글을 정말 좋아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그건 내 영혼의 일부였어. 아직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질 준비가 안 됐는데..."
"하윤아, 작가로서 언젠가는 글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잖아. 난 단지..."
"넌 내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하는구나." 하윤이 말을 자르며 통화를 끊었다.
그 후 며칠 동안 하윤은 도민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문자와 전화가 끊임없이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그녀는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이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내밀한 생각들이 담긴 글을 도민이 허락 없이 타인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주일 후, 하윤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민이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후회가 묻어 있었다.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도민이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미안해, 하윤아. 내가 너무 경솔했어. 네 허락 없이 원고를 보낸 건 잘못된 결정이었어."
하윤은 시선을 피하며 침묵했다.
"난 그저... 네가 항상 자신의 글을 숨기는 게 안타까웠어. 네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도민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안 돼. 네 신뢰를 저버렸어." 하윤은 마침내 그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왜 그 글을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해 못했어. 그건... 완성된 게 아니었어. 그리고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었고."
"알아. 이제 알아." 도민이 진심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작가로서 원고를 공개할 시기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네 권리야. 내가 그걸 빼앗았어."
하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단지 내 글이 좋아서 그랬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지만?"
"이건 단순히 원고 문제가 아니야. 넌 내 경계를 침범했어.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출시켰어."
도민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맞아. 그리고 그건 사랑이 아니야.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경계를 존중하는 거야."
하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도민의 진심 어린 사과가 느껴졌지만, 아직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시간이 필요해." 하윤이 마침내 말했다.
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기다릴게."
그날 밤, 하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민의 행동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글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믿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없는 일주일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잡지사에서 온 이메일이 있었다. 정중하게 그녀의 작품을 게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윤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필요로 했던 계기일지도 모른다. 도민이 그녀의 경계를 침범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글이 충분히 좋지 않다고, 세상에 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왔다. 하지만 진실은 그저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과 감정을 담은 글이 거절당하거나 비난받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양파의 법칙..." 하윤은 중얼거렸다. 하윤은 마치 양파처럼 겉껍질로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도민이 그 껍질을 강제로 벗겨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프고 분노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유롭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하윤은 연습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도민이 피아노 앞에 앉아 어떤 곡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하윤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으로 연주를 멈췄다.
"하윤아..."
하윤은 그에게 다가가 피아노 옆에 앉았다. "그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기로 했어."
도민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그럼 화가 풀린 거야?"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는 아니야. 아직도 네가 내 허락 없이 그랬다는 게 화나."
도민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하윤이 계속했다. "네 덕분에 내가 왜 그동안 내 글을 숨겨왔는지 깨달았어. 두려움 때문이었어. 거절당하는 것, 비난받는 것, 내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도민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넌 그 두려움을 무시하고 강제로 나를 밀어붙였어. 그건 잘못된 방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됐어."
"그래도 그건 내 잘못이야. 난 네 과정을 존중했어야 했어." 도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앞으로는 그러길 바라."
"약속할게. 다시는 네 허락 없이 그런 일 하지 않을게." 도민이 손을 내밀었다.
하윤은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잡았다. "근데... 그 편집자가 내 글을 정말 좋아했대?"
도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좋아했어. 오랫동안 그런 신선한 시각을 가진 신인 작가를 찾고 있었대."
하윤도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번 일은 교훈 삼기로 하자. 사랑은 상대방의 경계를 존중하는 거야. 양파 껍질을 억지로 벗기면 상처만 남을 뿐이지."
도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스스로 준비됐다고 느낄 때, 그때 함께 벗겨나가는 거야."
하윤은 도민 옆에 더 가까이 앉았다. "방금 연주하던 거... 새 곡이야?"
도민의 눈이 반짝였다. "응. 널 생각하며 만든 거야. 지난 일주일 동안."
"들어봐도 될까?"
도민은 다시 피아노 앞에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멜로디였다가, 점차 밝고 희망찬 선율로 변해갔다. 마치 갈등과 아픔을 거쳐 화해에 이르는 과정 같았다. 하윤은 눈을 감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들의 관계도 이 음악처럼, 어려움을 겪었지만 더 깊고 진실된 이해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 도민이 하윤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하윤은 미소를 지었다. "응. 이제 괜찮아."
그녀는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쓴 글이 있어. 네가 첫 독자가 되어줄래?"
도민은 감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준비됐어. 내 선택으로."
도민은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허락을 받은 선물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더 깊은 이해와 존중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양파의 껍질을 하나 더 벗겨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