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았다. 세 시간째 같은 문장만 읽고 있었다. '사랑은...' 그 다음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쓰는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랑에 빠졌고, 그 감정을 정의해야 했다. 하지만 하윤은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가을비가 유리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앞으로 숙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 연습실에 와볼래? 새 곡 작업 중인데 네 의견이 필요해."
도민의 메시지였다. 그를 생각하자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우연히 같은 카페에서 책을 읽다 알게 된 지 석 달.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하윤의 말없는 성격과는 달리 활기차고 직관적이었다. 정반대인 것 같으면서도, 예술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닮아 있었다.
연습실은 낡은 건물 지하에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도민의 피아노 소리가 하윤을 반겼다. 그는 연주에 완전히 몰입해 있어서 그녀가 들어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윤은 소리 없이 구석 의자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도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속삭이듯 부드럽게. 그가 연주할 때면 표정도 달라졌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깊은 내면의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하윤은 그런 도민이 신기했다. 자신은 늘 감정을 숨기려 애쓰는데,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마지막 음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도민이 눈을 떴다. 하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언제 왔어?" 그가 물었다.
"방금." 하윤은 거짓말을 했다. 이미 15분 넘게 앉아 있었지만, 그의 연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민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또 거짓말. 넌 내가 연주할 때 항상 그렇게 조용히 앉아서 보고 있잖아."
하윤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네 연주가 좋아서."
"어땠어? 새 곡."
하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슬프면서도... 희망적이야. 마치 비 내리는 날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것 같은."
도민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어떻게 알았어? 정확히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하윤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순간이 좋았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순간.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무슨 고민 있어?" 도민이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하윤은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할까 망설였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원고였다. 하지만 도민이라면...
"소설 쓰다가 막혔어.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인데, 뭔가 진부하게 느껴져."
도민은 피아노 의자를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사랑이 어떤 것 같아?"
하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물어보는 거야? 작가인 내가 정의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네가 아는 게 아니라 네가 느끼는 걸 물어보는 거야."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글이 안 써져."
도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배고프지? 뭐라도 만들어 줄게."
하윤은 그를 따라갔다. 부엌 조리대에는 몇 가지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도민이 양파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넌 사랑해 본 적 있어?" 하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민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양파를 자르기 시작했다. "응. 한 번."
하윤은 가슴이 조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의 과거에 누군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듣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어땠어? 그 사람은."
도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엔 모든 게 완벽했어. 서로의 좋은 면만 보였거든. 하지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다른 면도 보이기 시작했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거야."
하윤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서 헤어진 거야?"
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순간 슬픔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잠깐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양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좀 들고 있어봐."
그는 벗긴 양파를 하윤에게 건넸다. 하윤이 양파를 받자마자 매운 향이 코를 찔렀다. 곧 눈시울이 따가워졌다.
"아, 눈물 나." 하윤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도민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으로 비비면 더 심해져. 그냥 눈물이 나게 둬."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하윤의 눈에서는 양파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도민의 눈빛은 따뜻했다.
"사랑은 양파 같아." 도민이 말했다.
"눈물 나게 하는 거?"
도민은 고개를 저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길수록 더 작아지고 약해져 보이지만, 맛은 더 깊어져. 사랑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화려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서로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갈수록..."
"더 연약해지는 거야?" 하윤이 물었다.
"아니, 더 진짜가 되는 거지. 양파를 하나하나 벗겨가는데, 그 속을 보면 볼수록 정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일종의 연민이 드는 게 사랑 아닐까."
하윤은 놀라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상 도민을 자신보다 감정적으로 단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에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럼 내 소설 속 사랑은..." 하윤이 중얼거렸다.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약점을 보고도 사랑하는 거야.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불완전한 모습까지 모두 포함해서."
하윤의 머릿속에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메모를 했다. 도민은 그런 그녀를 미소 지으며 지켜보았다.
일주일 후, 하윤은 연습실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그녀의 원고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날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문을 열자 도민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왔구나!" 그가 반갑게 인사했다.
하윤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읽어줘."
도민은 놀란 표정으로 노트북을 받았다. "정말? 네 소설?"
하윤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고... 네가 도와준 부분만 써봤어."
도민은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열고 읽기 시작했다. 하윤은 초조하게 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웃음, 놀람, 때로는 진지한 표정까지 - 그의 얼굴에는 모든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도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감동의 빛이 어려 있었다.
"어때?" 하윤이 불안하게 물었다.
도민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건... 정말 놀라워.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줄은 몰랐어."
하윤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진심이야?"
"물론이지. 특히 이 부분..." 그는 화면을 가리켰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랑은 완벽함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함께 껴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이 문장이 정말 좋아."
하윤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글에 자신감이 생겼다.
"근데 네가 이렇게 사랑을 깊게 표현할 수 있다니 신기해. 네가 말했잖아,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다고." 도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석 달 동안 그의 옆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물결쳤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이었다가, 점점 더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변해온 감정들.
"글쎄...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도민의 표정이 멈칫했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말없는 이해가 오갔다.
"그 사람은 알아?" 도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지만 곧 알게 될지도."
도민은 천천히 노트북을 내려놓고 하윤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 도민이 말했다. "그 사람이 쓴 글 중에 이런 게 있어. '그 사람의 단단함에 반한 줄 알았는데, 결국 내가 사랑한 건 그 단단함 속에 숨어 있는 연약함이었다.'"
하윤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방금 그가 읽은 그녀의 소설 속 문장이었다.
"네가 쓴 문장이 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어." 도민이 계속했다. "난 네가 처음에는 조용하고 차분해서 좋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단단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따뜻함과 섬세함을 알게 됐고... 그게 더 좋아졌어."
하윤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글로만 표현했지, 직접 말로 하는 것은 어려웠다.
"말 대신 이걸로 대답해줘." 도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피아노 앞으로 하윤을 이끌었다. 둘이 나란히 앉았다. 도민이 간단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손을 들어 몇 개의 음을 더했다. 어색했지만, 도민의 멜로디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들은 말없이 함께 연주했다. 때로는 불협화음이 나기도 했지만, 곧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그들의 관계처럼.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은.
연주가 끝나고, 도민이 하윤을 바라보았다.
"이게 사랑인 것 같아." 그가 말했다. "완벽한 하모니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소리."
하윤은 미소를 지었다. "양파 같은 거네."
도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양파의 법칙. 껍질을 벗길수록 눈물은 나지만, 마음은 더 깊어지는."
하윤은 천천히 도민에게 기대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도민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하윤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랑은 완벽하지 않았다. 서로의 모든 면을 알게 될수록, 서로의 상처와 약점을 마주할수록, 오히려 더 깊어지는 사랑. 양파의 법칙처럼.
집으로 돌아온 하윤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사랑은 양파와 같다. 겉껍질은 단단하고 메마르다. 하나씩 벗겨갈수록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다.'
하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하는지.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민의 메시지였다.
"내일 저녁에 요리할 건데, 같이 할래? 양파 좀 많이 사올게."
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화면을 바라보며 대답을 적었다.
"좋아. 이번엔 내가 양파 자를게. 눈물 흘릴 준비 됐어."
그리고 그녀는 다시 소설로 돌아갔다. 이제 그녀의 주인공은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