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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과 조우하다: 장류진 소설집, 연수

by 은수달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 다음으로 탄생한 장류진 소설집 <연수>에는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 '연수' 등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첫 소설 '연수'의 주인공 주연은 공인회계사 시험은 쉽게 합격하고서도 운전면허는 어렵게 딴 사람이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을 통해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누군가의 도움 혹은 연대를 통해 조금은 수월하게 헤쳐갈 수 있음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운전처럼 누구나 다 하는 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도저히 못할 것 같은 마음이 정말로 옅어지는 것 같았다. (31)


Q.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누군가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위안을 얻은 적이 있나요?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49)


Q. 누군가에게 위와 같은 격려를 받거나 스스로 격려한 적 있나요?


살다 보면 운전 연수처럼 막연한 공포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 누군가 '잘하고 있다'라고 응원한다면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소설 <펀펀 페스티벌>은 대기업 신입사원들이 극한의 환경 속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남는 일화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모 기업에서 면접을 3차까지 본 경험이 떠올랐다.


세 번째 소설 <공모>는 가장 개성이 두드러지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제목처럼 우리 사회는 타인과의 협력보다는 공모를 강요받고, 거기에 가담하면서 서로의 민낯을 보기도 한다.


17년 전 이맘때, 나는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환영회식 명목으로 퇴근 후 부서 전체가 다 같이 미리 예약해 둔 회사 근처 고깃집에 갔던 날로 기억한다. (97쪽)


회상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은근히 풍기면서 매상을 올리는 천 사장과 그녀에게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김 부장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위아래로 동시에 조져버리니까 뭐, 안 갈 수가 있나." (120)


위의 구절을 통해 우리는 각종 유혹에 쉽게 휘말리거나 특정 목소리가 조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미라와 라라>는 글쓰기를 소재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국문과 만학도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창작회 일원이 된 미라는 크레타섬으로 창작 여행을 떠난다. 실력이 부족했던 그녀는 다른 이의 노트 앱을 우연히 발견하고, <모두에게 별 하나>라는 작품이 탄생한다. 예술가로서의 양심과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은지는 미라 언니가 형편없는 소설을 들고 와서 봐달라고 할 때나 자기가 나중에 소설가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면, 본의 아니게 언니가 문학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도 했다. (299)


한 달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언니는 그 소설을 그대로 텍스트로 변환하고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게 바로 내가 읽은 <모두에게 별 하나>였다. (312)


나 역시 슬럼프에 빠진 입장으로서 얼마나 안 써졌으면 그랬을까, 오죽했으면 이런 짓까지 하게 된 걸까 불쌍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자기 이름으로 수업시간에 제출할 생각을 했다는 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313)


훔친 글로 완벽하게 남들을 속일 수 있을 거라는 미라의 환상은 '한지수'라는 배우의 등장으로 산산조각 나지만, '박미라 차장'이 된 후에도 소설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 그러한 미련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 일도.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잊힐 해프닝일 뿐이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미안하지만 어차피 미라 언니가 소설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327)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만큼 절실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것이 때론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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