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장녀의 기쁨과 슬픔

by 은수달


"3시 반쯤 사무실에서 나가 현장에 들렀다 서면 가자."


사장님이 차를 안 가져왔다며 대리운전을 요청했다. 회사에서 시내까지 막히는 시간이라

살짝 우려했지만, 이미 교통체증을 여러 번 겪은 터라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자 섣부른 판단이었다.




현장에 4시쯤 도착해서 관계자들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니 어느덧 4시 20분경.

서둘러 가도 5시 안에 도착하긴 무리. 그런데 옆에 타자마자 '5시까지 갈 수 있겠지?'라고 묻는 사장님.


"네?...."


상습 체증구간을 지나면서 제시간에 도착할 거란 기대는 금물. 부산의 동쪽과 서쪽을 가로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동서고가로. 경남에서 서면, 해운대 등 주요 지역을 관통하는 심장과도 같은 도로라 때론 밤늦은 시간에도 막힌다.


"어쩌지? 5시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5시는 무리예요. 전화해서 늦는다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비의 소요 시간을 굳게 믿는 사장님한테 시간이 아마 10분 이상은 늘어날 거라며 단호하게 얘기했다.


어머니이자 사장님인 그분을 모시느라 K 장녀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비서부터 바리스타, 정원사, 운전기사 등 맡은 역할도 다양해서 가끔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거기다 날씨처럼 기분이나 컨디션이 수시로 바뀌는 여사님을 모시려면 구급대원 못지않은 순발력과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K 장녀로 오래 살다 보면 나름의 요령을 터득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시간 개념. 약속 날짜와 시간을 몇 번씩 확인하고 가능한 제시간에 맞춰 나가는 나와 달리 사장님은 시간 개념이 별로 없다. 만일 5시에 약속했다면 1시간 정도 걸려도 4시 20분쯤 나간다. 가족이나 지인들이 어디쯤이냐고 물으면 '다와 간다'는 애매한 말로 둘러댄다. 거기다 급하게 일정을 바꿀 때가 종종 있어서 나의 개인 일정을 울며 겨자 먹기로 미루거나 바꾸어야 한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사장님의 일정이다. 거기에 맞춰 미리 약속을 바꾸거나 동선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신발엔 양말이 안 어울리네. 담엔 스타킹 신어야겠다."

"신발이 너무 튀는 거 아냐?"

"치마가 너무 짧은데?"

"남자 친구는 자주 만나니?"


운전 자체도 스트레스받고 힘든데, 옆에서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질문 폭탄은 몇 배 더 힘들다.

그래서 모범답안을 만들어놓았다. 대답 한 마디에 차 안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지거나 사장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녀로 태어나서 유일한 장점은 부모님이 나름 눈치를 살피고, 일을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동생들은 그나마 만만한데, 넌 속을 알 수 없어서 여전히 어렵다."

오래전, 어머니가 하소연처럼 내뱉은 말이다.


동생들보다 날 더 편하고 만만하게 보시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어쨌든 사장님 모시느라 헬 구간을 아슬하게 지나갔지만,

퇴근 후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K 장녀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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