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종지 엄마와 양푼이 딸 #10

달라도 너무 달라

by 은수달


부모는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 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니체의 책에서도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이고 철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만들어 내며 천진난만하게 웃을 줄 아는 아이를 말한다.



엄마가 어린애처럼 변하기 시작한 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다.

"이제 나는 고아네."

내가 다섯 살 무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삼촌들을 뒷바라지하며 억척같이 살아온 엄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무조건 내 편이었던 외할머니는 가끔 엄마랑 갈등을 겪으면 '착하고 마음 넓은 네가 좀 참아다오. 내 딸이지만 성격이 보통은 아닌 거 아니까.'라며 날 토닥여주었다. 엄마도 힘든 일이 있으면 외가를 찾아 외할머니한테 하소연을 했고, 외할머니는 묵묵히 들어주거나 아니다 싶으면 본인의 생각을 소신껏 밝히기도 했다.


아이의 감정을 다룰 때는 아이의 감정을 나무라지만 않아도 잘하는 겁니다.(오은영의 화해, 149)


'해야 한다'가 죄책감까지 자극하는 것이 바로 육아예요. 이걸 못하면 아이가 잘못될 것 같고,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우는 것 같아서 불안해집니다. (118)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을 잘해야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조건 없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만으로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 자식입니다. (99)


"엄마를 더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 나름의 기대나 계획이 있었는데... 어쩜 엄마를 그렇게 배신하니?"


나의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고 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단지 엄마가 원하는 방식이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만으로 난 엄마를 배신한, 배은망덕한 딸이 되어 있었다.


"네가 첫째니까 엄마 대신 동생들 잘 돌보고 밥도 챙겨줘야지."

"네가 큰딸이니까 엄마를 이해해 줘야지."

"안 그래도 엄마가 스트레스받고 힘든데 너까지 꼭 이래야 하겠니?"


K 장녀라면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장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 뿐.



물론 간장종지가 양푼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아니,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딸의 입장이나 마음을 진지하게 헤아려봤다면, 본인의 행동을 돌이켜봤다면 자신이 낳은 딸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진 않았을 것이다.


'이해 못 해서 미안하다. 그동안 엄마 대신 동생들이랑 조카들 돌보느라 고생 많았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위의 두 문장이 아니었을까.


상대의 입장이나 감정에 공감하면서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양푼이와 상대의 입장 따윈 저 멀리 던져버리고 저만 이해해 달라고 얘기하는 간장종지. 달라도 너무 다른 엄마와 딸.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너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넌 이미 할 만큼 했고,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돼."

친구의 얘기가 위안이 되면서도 앞으로 간장종지와 살아갈 날들이 두렵고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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