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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동물원을 해부해보려고 합니다

동물원 해부일지를 시작하며

by eun



동물들이 스스로 동물원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남아 있을까?



2B379912-1E26-4302-AEAA-068DE2D4A04B_1_102_a.jpeg 런던 동물원, 훔볼트펭귄 (London Zoo, Humboldt penguin)_직접촬영

어느 겨울날, 런던동물원 펭귄 비치(Penguin Beach)에서 한 시간 넘게 찬 바람을 맞으며 홀로 펭귄들을 바라보았다. 야외에서 오래 앉아 있기엔 겨울 런던의 날씨가 매서웠지만, 수많은 훔볼트펭귄(Humboldt Penguin)들과 함께 물멍을 때릴 기회는 흔치 않다는 생각에 흐르는 콧물을 닦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영국에서 가장 큰 펭귄 풀장이라는 1,200㎡ 규모의 펭귄 비치. 하지만 그곳을 헤엄치는 훔볼트펭귄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곳이 영국 내 최대 규모라지만, 수십 마리의 훔볼트펭귄을 담기엔 턱없이 작아 보였다.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먹이를 찾는 그들에게 이 작은 풀장이 충분할까.


그렇게 펭귄들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들이 스스로 동물원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남아 있을까?"


인간은 동물원을 통해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의학적 관리를 해주며,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정작 동물들은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만약 철창이 사라지고, 우리가 만든 이곳을 떠날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여기에 남아 있을까?








Ia5-66xiSj0hhs3SAQrV26mCY64 ©2005.dreamworks. 영화 마다가스카(Madagascar)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Madagascar)를 보면, 뉴욕 동물원 동물들이 탈출해 야생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중 동물원의 마스코트인 사자 알렉스는 동물원 생활에 완벽히 적응해 만족스럽게 살아가지만, 10살 얼룩말 마티는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끼고 야생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어쩌면 동물들도 마다가스카의 알렉스처럼 성향에 따라 동물원에 머물기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대의 동물원은 단순한 전시장 역할을 넘어, 많은 동물들에게 생존에 있어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고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멸종 위기 동물들은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내가 만약 남아메리카에 사는 훔볼트펭귄이라면 어떨까? 주요 포식자인 남아메리카물개(South American sea lion)의 위협 속에서 사는 것보다, 안전하고 먹을 걱정 없는 동물원의 삶을 더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농담 삼아 야생동물들에게 동물원 입주 광고를 올리고 신청을 받아보면 어떨까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IMG_0249.JPG?type=w773 런던 동물원, 훔볼트펭귄 (London Zoo, Humboldt Penguin)_직접촬영

"안녕하세요, 저 훔볼트펭귄인데요. 런던 동물원 입주 광고 보고 왔습니다."















동물원은 사라져야 하나, 진화해야 하나

동물원을 둘러싼 찬반 논쟁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동물의 의사를 알 수 없으며,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동물원은 계속 운영되어 왔다. 그리고 그만큼 동물원을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는다.


3624QXHBmCTjsFHX98TQ896x99Q 런던 동물원, 몽키벨리(London Zoo, Monkey Valley)_직접촬영

이런 논쟁 속에서 우리는 동물원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동물원은 동물들의 비윤리적 감옥?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는 동물원 동물들은 무죄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동물원의 존재를 반대하는 이들은 가장 먼저 동물의 자유와 복지를 침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야생에서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코끼리는 몇 미터 안에서 생활해야 하고, 드넓은 바다를 헤엄쳐야 할 범고래는 작은 수조 안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


FoCqNebBU_LMDWLw8DeO4VsC92M 코엑스 아쿠아리움, 푸른 바다거북 (Coex Sea Turtle)_직접촬영 *글의 내용과 관계없는 사진*

이런 환경은 동물들에게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정형 행동(Stereotypic behavior)'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동물원은 동물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비자연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물원이 인간 중심적인 공간이라는 비판도 있다. 동물원은 교육과 보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많은 동물원에서는 돌고래 쇼, 코끼리 공연 같은 상업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동물들을 오락거리로 소비한다.

kJIotKQad4QS7vlPcMJCU4mAr4w 에버랜드 씨라이언 빌리지, 애니멀톡 물개쇼 (Everland Sea Lion Village, Animal talk Sea lion show)_직접촬영

동물쇼는 동물에게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다. 쇼에 사용되는 동물들은 대부분 자연에서 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강요받는다. 예를 들어, 돌고래가 점프하거나 코끼리가 두 발로 서는 동작은 야생에서 필요하지 않은 행동이지만, 조련 과정에서 반복적인 훈련과 보상을 통해 억지로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물들은 강압적인 훈련을 겪기도 한다.

결국 동물쇼는 자연스러운 동물의 행동을 왜곡하고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요소가 많아 동물 복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다른 의견은 동물 보호의 해답이 동물을 가둬두는 동물원이 아니라 야생 보호 구역 확대와 서식지 복원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물 보호 단체들은 자연보호 구역, 국립공원, 야생 복귀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동물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동물 보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동물원은 동물 보전 최후의 보루


반대로 동물원을 지지하는 이들은 동물원이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동물 보호와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는 역할은 현대 동물원의 가장 큰 존재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동물원이 없었다면 캘리포니아 콘도르(California condor)나 자이언트 판다(Giant panda) 같은 동물들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bJXFycbgpBoYmLdv4USRi_lgqU0 에버랜드 판다월드, 자이언트 판다 (Everland Panda World, Giant Panda)_직접촬영

번식 프로그램과 서식지 복원을 통해 많은 동물들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이는 동물원이 단순한 감금 시설이 아니라 보전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 측면에서도 동물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희귀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질병을 치료하며, 번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수의학적 발전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

sNy_qrz0-PgnLf6S8Cd70kOH7bA 런던 동물원, 호랑이 응급처치 방법 설명문(London Zoo, Tiger first aid)_직접촬영

야생에서는 연구하기 어려운 동물들의 건강 상태를 관리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동물원 수의사들은 수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야생 보호에도 적용될 수 있다.



또한 동물원은 동물 보호와 연구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많은 생츄어리(Sanctuary)와 야생동물 보호센터는 기부금과 비영리 단체의 지원에 의존하지만, 동물들의 먹이, 의료관리, 서식지 조성 등 필수적인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재정적 한계가 크다. 반면 동물원은 입장료, 기념품 판매, 체험 프로그램 등의 자체 수익을 통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며, 이를 바탕으로 동물 복지를 향상하고 멸종 위기종 보호에 기여하고 있다.


Screenshot 2025-03-18 at 10.37.22 PM.png 이미지 출처: "샌디에이고 동물원 간판 (San Diego Zoo Sign)" 출처: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예를 들어,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은 자체 수익을 활용해 멸종 위기종 연구와 보전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동물원 역시 경제적 자립을 바탕으로 다양한 보호 활동을 운영 중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물원의 경제적 역할은 단순한 운영을 넘어, 동물 복지와 보전을 위한 필수적인 기반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동물원은 사라져야 하나?


동물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동물원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적이다. 기존의 전시 중심 동물원에서 벗어나, 진화하는 동물원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미 일부 동물원들은 변화를 시작했다. 전통적인 철창식 전시를 없애고, 동물들이 보다 자연에 가까운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생태형 동물원'을 도입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샌디에이고 사파리 파크나 싱가포르 동물원처럼 넓은 서식지를 제공하고, 동물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동물원은 단순한 전시 공간에서 벗어나 연구와 보전 활동의 중심지로 변화하고 있다. 야생동물과 멸종 위기종 보호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방문객들에게도 동물 보호의 필요성과 특정 종을 동물원에서 보호하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동물원이 단순한 관람 시설이 아니라, 동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동물원을 해부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동물원들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물원은 다양한 문제와 논란을 안고 있다. 수의대생이자 동물원 수의사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동물원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동물원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동물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동물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한 철학적 고민을 넘어 동물원이 동물들에게 더 나은 환경이 되고,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과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직접 동물원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내 두 발로 동물원을 걸으며, 내 눈으로 그 현실을 확인하고, 동물원의 역할을 깊이 탐구하고 싶다. 단순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곳곳의 동물원을 방문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곳에 기록해 나가려 한다.

Y0OW10HlT2GaDWFhbP0s1CUAv8w 런던 동물원, 사바나얼룩말 (London Zoo, Plains Zebra)_직접촬영

이렇게 쌓여갈 '동물원 해부일지'가 나의 꿈을 이루는 길이자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영감이 되어주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포함한 동물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기록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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