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미끄러지고, 주체는 탈구된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없다. 성폭력도, 육식도, 아동학대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 속에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은폐된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소수자성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구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맥락들이 있다. 그러한 구조적 맥락 내에서 소수자성을 지닌 이들의 말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주체성은 탈구된다. 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로잡고, 탈구된 주체성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소수자’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칭해지지만 수없이 분열된 주체들의 소외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박은 인도의 과부희생(사티, sati) 관습이 폐지되는 과정을 분석해 (여성으로서의) 서발턴이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분석했다.“힌두 과부는 죽은 남편을 화장한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자신을 불에 태운다(스피박: 104).” 사티 관습의 폐지는 인도 식민지 시절, 영국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스피박은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스피박: 99)”라는 문장으로 서술한다. 백인종 남자는 인도의 사티 관습을 비윤리적 행위로 규정하고, 비윤리적 행위의 희생양이자 구원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황인종 여자를 바라본다. 한편, 황인종 남자는 “여성들 중에는 과부희생을 진정으로 원했다”고 황인종 여성을 ‘대변’함으로써 여성을 영웅화하기도 한다. 실제 황인종 여성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당사자는 희생양과 영웅의 두 극단의 프레임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말할 수 없는 혼재의 상태로서 남을 뿐이다. 백인종 남자와 황인종 남자로 칭해지는 권력의 담지자는 당사자를 재현하고, 그로 인해 당사자 자신의 주체성과 말이 사라지거나 미끄러진다. 여성으로서 서발턴은 자본주의-제국주의-가부장제에 의해 중층결정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저 아래 혹은 저 바깥에 존재한 채 그저 재현될 수밖에 없다.
스피박에 의하면 재현(representation)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변(speaking by)으로서 설득과 수사의 의미가 있다면, 다른 하나는 다시 표현(re-presentation)하는 것으로서 묘사의 의미가 있다. 두 의미는 연결되지만 비환원적이다. 재현의 상황에서 두 의미는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재현 주체는 재현 대상을 묘사하며 대변함으로써 의도적/비의도적으로 생략/왜곡/활용한다. 1, 2인칭의 경험을 3인칭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과정에서 화자 고유 서사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인칭 시점으로 말하기에 있어 화자 자신의 위치를 끊임 확인하는 과정은 말하기의 윤리로서 요구된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앞에 놓인 식물에 대해 아는 바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설명(재현)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파리와 줄기의 모양을 왜곡하고, 보이지 않는 뿌리와 그 외의 부분들을 생략한다. 식물을 덮고 있는 흙에 대해 설명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나의 말하기에서 식물의 당사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의 말하기 또한 마찬가지다.정치가가 시민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정치가는 자신의 말하기(설득)에 근거로 적합한 ‘시민’의 형상을 재현(묘사)한다. 그가 재현하는 시민의 형상은 지극히 선택적이다. 그가 말하는 시민에 누가 포함되는가, 여성과 아동과 장애인과 노인과 비인간의 포함 여부는 시민에 대해 3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있는 화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한편 화자가 말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선택 또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구조 안팎으로의 영향을 받는다. 다만, 그 화자가 자리한 사회적 위치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흐름과 맞닿을수록, 난무하는 지배 언어들에 힘입어 재현할 대상에 대한 선택과 묘사할 언어의 선택을 더 쉽고 간편하게 할 따름이다.
지구적 차원으로 재현주체-재현대상을 확장하여 지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서발턴에 대해 살펴보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국제노동분업 체제와 제국주의의 법과 교육에 의한 인식론 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작동하면서 자본권력을 쥔 강대국은 초국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제3세계는 그들의 노동력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역할 맡고 있다. 자본가로서의 강대국과 노동자로서의 제3세계의 관계로 자본가-노동자의 관계가 확장되며, 노동의 분업 형태 또한 국제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거대한 지배-피지배 틀은 제국주의의 법과 교육에 의해 하나의 인식론을 구축함으로써 지속적인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각 국가/민족 고유의 역사들은 제국주의의 틀 안에서 재해석되고 다시 만들어진다. 제국주의 권력은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는 말로써, 자신들이 행한 식민지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고 구원 서사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한편, 기존의 지배 담론을 쥐고 있던 제3세계 지배 권력은 제국주의 권력 아래 귀속됨과 동시에 기존 담론의 타당성을 입증함으로써 그들의 권력 일부나마 유지하고자 한다. 제3세계 기존 권력은 “그들(힌두 여성 과부)이 원해서 어쩔 수 없이 지속되었던 부분도 있다”고 이야기하며 기존 관습의 폐지 과정에 합류함으로써 제국주의의 구조 아래서 자신들의 영역을 담보받는다. 이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서발턴은 중층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타자화당한다. 국제노동분업 체제와 제국주의의 법과 교육의 질서, 기존 가부장제의 시선에 의해 ‘자기’로서 말하기의 영역을 빼앗긴다.
중층결정된 체제의 안과 밖에서 주어진 언어를 초과해 위치지어질 수 없는 채 부유하는 존재들은 정말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서발턴은 말할 수 없는 채 그들의 주체성을 박탈당한 존재로서만 남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그 미끄러진 말들을 제자리가 가져다 놓아야 하며, 탈구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서발턴의 말조각을 모으고, 서발턴으로서 자아들의 말들이 담론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참고문헌>
가야스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