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장에선 내가 제일 후배니까

유품자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흰 띠 꽉 동여매고 인사 올립니다.

by 은하나

시작의 낯설렘

처음은 늘 낯설다. 공기까지 낯선 기분, 오랜만이었다. 도장 입구부터 울리는 사범님의 기합소리, 뒤를 잇는 아이들의 기합소리와 발차기 소리. 낯설지만 설렜다. 새로운 공간에 날 데려다 놓는 것만으로도 리프레시가 되는 것 같았다. 첫날이라고 조금 이르게 도착했더니 전 타임 수업이 끝나기 전이라 수업이 한창이었는데, 초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만 가득했다. 아이들은 내가 들어오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데, 괜히 혼자 머쓱했다.

“아! 오셨어요? 이 쪽으로 오세요!!”

쩌렁쩌렁 울리게 반겨주신 덕분에 시선이 집중됐고, 웃음에 머쓱함이 묻어났을 것이다. 도복을 받아 갈아입는데 빳빳하고 차가운 도복 촉감에 정신이 번뜩했다. 도복을 입고 나오는 사이 전 타임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갔다. 혼자 쭈뼛거리며 도장 이 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는데, 사범님이 오셔서 띠를 매주셨다.

“띠는 어떻게 매는 거냐면요. 엑스자로 교차해서 아래에 있는 쪽을 위로...”

‘와, 시작이다. 나 진짜 태권도하나 봐.’


슬슬 나와 같은 타임인 것 같은 아이들이 도착했다.

문제는 정말 ‘아이들’만 왔다는 것이다. 그래도 전 타임이 초중학생쯤 되어 보였다면, 이번 타임은 중고등학생 친구들이었다. 아이들과 나는 서로 어떤 경계선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머쓱해했다. 정말 성인은 나뿐인 건가 싶던 순간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각 제대로 선 내 도복과 달리 오래 입어 흐물 해진 도복, 새하얗고 빳빳하게 좌우로 쫙 뻗은 내 띠와 달리 하루 이틀 맨 것 같지 않은 검은 띠. 도장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하게 몸을 푸는 모습들. 고수의 향기. 세상에, 너무 멋있잖아! 실감이 났다. 이 '분'들은 앞으로 내 선배님들이다!


태권도복은 보통 희고, 띠도 이보다 얇긴 하다.


이 곳에선 내가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나이가 많고 적든 전혀 상관없이 리셋.

이제부터 나는 그냥 태권도 수련 1 일자 쪼렙일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기분 좋았다. 회사에선 늘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물론 회사에서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데 스스로가 만든 기준이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면 힘들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노력했고 결국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성장할 수 있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밑천이 드러나면 어쩌나 문득문득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곳에선 이러나저러나 난 쪼렙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왕초보 1단계 흰 띠 막내둥이! 이 곳에선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색하게 동여맨 흰 띠가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무엇이든 알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니겠냐고! 못 하는 게 당연하고 모르니까 알아가면 그만인 거지.


'자, 다들 모이세요!'

열심히 해봐야겠다 생각하며 기분 좋은 긴장감에 두근대던 찰나. 사범님이 모두를 모아 세웠다. 오늘부터 함께 하게 되었으니, 언니 누나 잘 도와주며 운동하길 바란다 하시니 모두 우렁차게 넵! 하는데. 내가 회사에서 영혼 없는 넵무새처럼 내뱉던 그것과는 사뭇 달라 귀여웠다. 나만 성인이고 다 애들이면 어쩌지 싶었는데, 정말 그리되었지만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 1단계를 시작해보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새로 집중할 무언가가 생겨 기분 좋은 첫날.


유품자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에선 제가 막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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