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실화에 기반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글 중에 딱히 안 그런 것은 없지만, 이번 글은 특히나 내 개인적인 경험 그 자체를 기반으로 한다. 이 글은 힘들게 들어간 첫 영국 회사에서 눈물을 머금고 나와 2번째 구직을 하던 중 만났던 사전과제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때는 너무 지쳐서, 정말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유럽여행이나 한바퀴 크게 돌고 한국에 확 가버릴까 했던 참이었다.
이곳에 꿈을 품고 온 사람들 중 취업이 안되고 과정에 지쳐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금은 그 괴랄한 문제를 냈던 회사에 합격해서 하루하루 혼이 쏙빠지게 보내는 중이다. 아무튼, 이건 어떤 인사이트 전달이나 정보공유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별도 요청도 있었고,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출출할 때 꺼내먹는 간식정도로 즐겨주었으면 한다.
정말 내가 받은 과제 중 가장 당혹스러운 과제였다. 그날도 구직활동을 위해 귀차니즘과 우울감을 뚫고 네트워킹 모임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이전에 지원했던 한 회사에서 1차 합격안내 메일이 과제물과 함께 도착했다. 과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의 채용과정을 디자인하시오.
허어, 이놈 봐라.
가능성은 2가지중 하나, 뭔가 뚜렷한 자기철학을 가지고 그걸 테스트하기 위해 정말 신중하게 고른 과제이거나, 아니면 면접관 지 스스로도 본업에 너무 지쳐서 대체 뭘 과제로 줘야할지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마침 막막하기도 하니 그냥 던져본 것일 거라는 예감이 스쳤다. (설사 후자라 해도, 평범한 놈은 결코 아닌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데 사실, 이건 나에게 절호의 기회여서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하고싶은 일을 시켜줄 수 있는 포지션이 많지 않아서 지원자체도 어려웠는데, 이 과제는 내가 정확하게 원하는 포지션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이자 나는 '생각의 힘'을 가진 디자이너라는 걸 증명할 좋은 기회였다.
물론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채용을 취소하기도 하고, 웬만하면 뱉은말은 지키는 한국과 달리 변덕이 있을 수 있어서, 최대한 빨리 해서 답신을 보내 먼저 눈길을 사로잡아놔야 면접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오는 길에 급히 머릿속으로 어떻게 채용과정을 디자인할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채용과정이란 건 뻔하긴 하다. 기준에 들면 붙는 것이고, 아니면 탈락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 포지션에 요구되는 역량은 무엇이며, 이 회사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채용과정에서 이 회사가 지원자들에게서 찾아봐야 하는 역량부터 명확히 정의했다.
제일 먼저 빠르게 프로덕트 디자이너에 대한 정의를 구글링 해, 대충 유명해보이는 사이트들에서 언급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정의를 모았다. 그리고 거기서 공통적인 핵심 키워드를 추려 이 포지션에 대한 나만의 한줄 정의를 만들었다.
이 한줄 요약은 전반적인 채용 프로세스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뼈대가 된다.
(사실 이 단계는 그렇게 오래걸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마침 전 회사에서부터 다시한번 내가 원하는 포지션에 대한 고민을 수개월간 해오고 있던 터라서였다. 평소에 내가 중요시 하던 것들을 조금 보태기만 하면 되는거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우선, 이전 단계에서 내가 채용담당자라면 지원자로부터 무엇을 알아내야 하는지 큰 목표는 정해졌다. 바로 'solve a complex problem'였다.
그럼, 그 complex problem은 정확히 뭘 말하는 걸까?
나는 이전 회사에서 내 직무에 대해 시니어 디자이너와 상담하며 들은 이야기들을 참고해 다음 3가지로 구체화했다.
1. 빠르게 변화하는 업무환경 속에서 수많은 task들과 풀어야 할 문제들 때문에 쉽게 집중하기 어렵다.
2. 거시적, 그리고 미시적 관점 모두에서 고민해야 하는 수많은 제약조건과, 현실적 여건들
3. 수많은 소통 오류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해관계자 간의 수많은 혼란들
그리고 이를 채용담당자가 채용 프로세스에서 확인해야 하는 구체적인 4가지 체크리스트로 다시한번 번역했다.
1. 지원자는 어떻게 우선순위를 설정하는가?
2. 지원자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상황들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3. 지원자는 비즈니스, 사용자, 현실적 측면에서의 적합성(의역함) 3가지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4. 지원자는 다양한 유형의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소통하는가?
일단, 해결방법도 여러가지가 될 수 있으니 나는 채용 담당자의 현실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뽑았다. 이는 내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이 전체 프로세스와 결이 맞는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일단, 솔루션을 제시하기 전에 나는 위에서 언급한 4가지 체크리스트를 '실증적' 검증이 필요한 항목과 '구두답변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항목으로 구분했다.
실증적 검증이 필요한 항목:
1. 지원자는 어떻게 우선순위를 설정하는가?
2. 지원자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상황들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구두 답변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항목:
3. 지원자는 비즈니스, 사용자, 현실적 측면에서의 적합성(의역함) 3가지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4. 지원자는 다양한 유형의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소통하는가?
그리고 각 그룹별로 그 이유와 함께, 나는 총 2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실증적 검증을 위한 솔루션]현재 채용중인 회사가 실무에서 실제 겪었던 문제상황과 가장 유사한 케이스를 내부 투표로 정해, 과제 부여하기
[인터뷰를 위한 솔루션] 지원자에게 계속해서 이유를 물어보기
이 단계도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사람을 뽑는 건 아주 귀찮고, 또 한번 저지르면 쉽게 돌이키기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수용하더라도, 지속적인 개선과 발전을 위해 이 아이디어들의 효과를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도 함께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시한 검증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이 회사와 유사한 비전, 규모, 분야에 있는 다른 팀의 채용 결과와 비교해, 합격자가 얼마나 회사에 오래 근속했는지 알아보기
이 제안은 아마도 비슷한 성향의 회사라면 그만큼 이 회사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뽑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100% 동일한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래도 보통 회사끼리는 네트워킹 모임을 통해 작은 팁들을 서로 공유하기도 하니, 최대한 조건이 비슷한 곳의 성과와 이 회사의 성과를 비교해 이 회사가 더 장기간 근속을 만들어 냈다면, 내 솔루션은 적합한 솔루션이 된다.
2. 지원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녹화해, 내부적으로 함께 일할 다른 멤버들과도 공유하여 그들이 지원자의 답변과 생각에 얼마나 동의하고, 만족하는지 5점 척도로 평가하게 하기
이것도 중요한 검증 내용이라고 봤는데, 개인적으로 회사생활을 통해 결국 일은 사람들이 모여 해내는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자주 소통하고 함께 일할 동료들 또한 지원자가 마음에드는지 확인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한)다.
그리고 대충... 뭐 결과가 좋으면 좋은거고 만약 실패했다면 어떻게 할건지.. 간단한 action plan도 덧붙여서
메일을 보냈다. (-휴)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었어서, 최대한 단기에 끝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메모장을 켜서 계속 흐름을 다듬고, 집에와서는 부랴부랴 문서화를 하느라 혼꾸녕이 났다. 사전과제 이후로도 대략 2-3회에 걸친 1:1, 1:N 인터뷰를 더 봤는데, 확실히 한국의 중소기업 채용이 더 빠르고 간편한건 맞는것 같다.
아무튼 대부분은 직접적인 디자인에 대한 과제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주제는 굉장히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고, 마침 내가 수년간 고민해오던 깊은 주제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풀어볼 수 있었던 기회여서 기억에는 좋게 남아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