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주고 약주는 이야기
(*정정한 부분은 이렇게 표시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책장을 앞뒤로 넘겨가며 반복해 문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비교적 어렵게 읽어낸 책이다. 하지만 끝내 책의 대부분의 챕터를 다 읽어보고 난 뒤에 얻은 나만의 인사이트는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도 책에서 읽은 내용들과, 이를 통해 갖게 된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 남겨보려고 한다.
한국 번역서로는 '생각한다는 착각'의 제목으로 된 책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영어독해가 어느정도 되는 분이라면, 나는 아마존에서 원서를 구입하더라도 원서로 읽어볼 것을 권장한다. 한국어로는 도저히 내용 이해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나같은 경우 중고로 팔고 원서를 새로 구입했었다.
목차
목차는 책의 얼개를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순서를 조금 재구성했다.
1. 책의 구성
2. 저자의 주장 및 근거
3. 근거를 보조하는 사례
4. 내 대뇌피질의 산물
우선 이 책은 크게 파트1과 2, 그리고 각 파트안에 여러 소단원으로 나눠져있다.
이 책의 구성은 아주 흥미로운데, 언뜻보면 마치 병주고 약주는 느낌의 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 더 쉽게 구성을 소개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책의 구성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선 파트1은 마치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라 굳게 믿는 아이에게 부모가 "그거 내가 사주는거야 바보야"라고 말하는형태다. 이 파트에서 부모의 말의 사실여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그 미스테리한 선물 배송에 대해, 정황 근거에 해당하는 의심의 씨앗들을 아이의 마음속에 뿌려, 아이가 믿어온 세계가 마구 흔들리게 만든다.
그리고 파트2로 넘어가면, 파트2에서는 파트1을 통해 자라난 의심을 증명시켜주는, 그 비밀스러운 선물의 12/24일자 구매 영수증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부정할 수 없는 근거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곧, 개박살나버린 아이의 마음에 후시딘을 발라주듯, 나름 따숩고 긍정적인 듯한 결론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의 구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우리에게 내면의 깊이 같은 건 없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판단, 믿음, 행동은 선원인→후결과 식의 선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그때 당시 가장 합리적이거나 말이 된다고 생각된 것을 갖다 붙여 그럴싸하게 말하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기성찰도,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해 스스로 이해(납득)하기 위한 해석과 설명을 실시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센세이셔널하다. 왜냐하면 이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존의 심리학, 철학 등 소위 '무의식'을 별도의 존재로 여겨왔던 여러 분야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여러 예시와 과학적 근거를 통해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뇌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
일단 우리가 하는 모든 사고행위들은 우리 뇌의 대뇌피질, 즉 가장 ‘바깥표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뇌의 안쪽(sub-cortical area)영역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지각정보들이 저장된다. 그리고 두뇌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심층부에서 대뇌피질로 전기신호를 쏘아 올리는데, 이렇게 전기신호 형태로 의식의 영역에 도달한 정보는 대뇌피질이 '생각'이라는 행위를 하는데 활용되어 추리, 해석 등 여러 사고활동이 이뤄진다.
일종의 power plant와 전봇대에 걸린 전선, 그리고 가정집에 전기가 보급되는 일련의 과정을 떠올려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생각에 대해 인식가능한 부위는 다 저 피질(뇌의 가장 바깥경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저자 닉 채터는 이를 'Boundary of consciousness' 라고 지칭한다.
실제로 우리 뇌의 부위별 기능을 밝혀낸 엄청난 업적을 일궈낸 신경외과의 와일더 펜필드의 연구에서도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
"Conscious experience requires linkage between diverse cortical areas and a narrow bottleneck deep in the brain(Sub-cortical area)... So what we may loosely call the ‘deep’ brain serves as a relay station between the sensory world and the cortex, and from the cortex back to the world of action"
(대충)의식적 경험은 다양한 대뇌 피질 영역들과 뇌 깊은 곳에 있는 좁은 병목 부분 간의 연결이 필요하다...(중략)... 따라서 우리가 대략 '생각의 심연'이라고 부르는 영역은 중계지점으로, 뇌의 심층부에서 대뇌피질, 그리고 대뇌피질에서 뇌 심층부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우리의 뇌가 사고라는 행위를 할 때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들여다보면, 어떤 관념은 특정한 생각의 씨앗에서부터 쑥쑥 줄기와 잔가지가 뻗어나와 그 가장 끝에 열매처럼 맺혀져 나온 결과값이 아니라, 딱 그 순간에 심층부와 대뇌피질, 두 영역간 전기신호 교환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는 현대 기술로 어떤 류의 사고나 행위에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는 검증되었으나, 정작 저 심층부와 대뇌피질 간 전기신호가 오고가는 그 과정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이란 이처럼 즉석에서 생성되는 성질을 갖기에, 실제로 우리 뇌는 많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가장 떠올려보기 쉬운 예시로는 '반지의 제왕' 영화가 있다.
1. 우리 머리를 통해 나온 것은 언제나 요만큼의 자기모순을 갖는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무수히 많은 영화들 사이에서도 그 스토리가 굉장히 촘촘하기로 유명한데, 팬들이 주어진 정보들을 모두 수집해 짜 맞춰보자 중간대륙(Midland)에 대한 내용에서 일부 모순점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고 한다. (뭐였는지까진 책에 안나옴.) 이는, 우리 뇌는 그저 과거의 체험, 학습, 감정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매 순간에 판단을 내려 이야기를 완성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예시인데, 이와 유사하게 신념이나 가치도 끝까지 집요하게 질문해 파고들면 반지의 제왕처럼 모순적인 지점들이 있으며, 명백히 설명되지 않는 측면들이 있고 복잡하고 불완전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2. AI의 연구가 아직도 완성을 못보는 이유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우리 뇌의 사고과정을, 마치 컴퓨터의 DB에서 미리 저장해둔 정보를 꺼내 열람하듯, 미리 형성되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된 생각들로 가득찬 곳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초창기 AI 연구에서는 다음 3가지 마일스톤을 순차적으로 정복하면, 우리 뇌와 똑.같.은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1단계) 우리의 정신적 깊이를 파헤친다. 그리고 내면에 있는 신념의 보고를 최대한 많이 표면으로(우리가 볼 수 있도록) 끄집어 올린다.
2단계) 숨겨진 ‘상식적 이론’을 발굴하기 위해 지식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한다. 그리고 이 지식들을 모두 컴퓨터가 작업가능한 정확하고 정밀한 언어로 변환한다.
3단계)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고, 언어를 쓰고, 문제를 해결하고, 계획하고, 대화하는 등의 지적인 행위에 관여하는 데 이 상식적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2단계에서 구축한 DB를 바탕으로 답을 끄집어 낼 계산법을 고안한다.
저 3단계까지 모두 완벽하게 정복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두뇌와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저자는 이렇게 오랜 세월과 수많은 연구에도 아직 궁극적으로 '동일한' 두뇌를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은, 이미 1단계 정복을 위한 주재료인 관념, 즉 인사이트가 임시-변통적이고 잠정적이며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2번, 3번으로 넘어갈 수 있는 안정적 토대가 되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인공지능을 보면, (의역)그 주재료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기에 현재의 AI는 인간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그 '불완전한 생각'들을 상식이론들로부터 완벽히 제거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고 꼬집는다.
3. 우리 뇌는 동시에 두가지를 사고할 수 없다.
이 그림을 보면, 우리는 (b) 그림에서 H와 B가 한데 붙은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가, 그 안에서 숫자 3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는 4를 읽어내거나 H와 B를 따로 구분해 인지할 수 있다. 그림 (e-맨 아래)에서는 총 25개의 모눈들의 조합 안에서도 사람들은 그 옆에 나열된 다양한 패턴의 베리에이션을 찾을 수 있지만, 절대 저 25개의 모눈이 모인 그룹에 대해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하는 다른 묶음에 대해서 ‘정확히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가지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순서를 두고 한번에 하나씩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3번째 근거사례다.
결론에 이르면, 저자는 그저 '우리 생각은 지극히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다'라는 주장을 넘어 '우리 내면에 자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한다. 자아라는 건, 실체가 없는 다분히 문학적 그리고 의미론적인 ‘단위’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감지한/경험한 정보들에 기반해 의식적 경험(사고)를 할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자아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무의식과 의식은 각자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을 거라고 믿어왔지만, 저자는 (비유하자면) 해수면을 기점으로 위로 솟아나와있는 빙산의 일각과 그 밑에 잠겨있는 커다란 부분 모두 ‘얼음’이라는 동일한 성질을 가진 한 덩어리이며 일부가 해수면 밖으로 나와있다고 해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또한 개별적으로 동작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에필로그 'Reinventing ourselves'에서 저자는 우리 생각(뇌심층부와 대뇌피질이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한번의 사이클)은 계속 반복 발생하며, 그 일련의 계속되는 사이클들이 우리를 계속 발전/변화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다음 2가지 생각이 들었다.
1. AI가 제 아무리 고도화 되어도, 우리는 그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펜필드 박사의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한 내용에서, 최근 몇년간 전세계적으로 화제인 ‘인공지능’을 떠올려봤을 때, 그 존재 또한 그 나름대로 발전해갈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저 인류가 창조해 낸 또하나의 고도로 발달된 존재가 될 뿐, 결코 인간과는 100% 똑같아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책에서 말했듯 아직 우리는 어떠한 사고가 일어날 때, 그 전기신호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단계들을 거쳐 그 생각이 떠오르는지는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뇌파 측정같은걸 해도, 현대 기술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어느 부위가 어떤 류의 생각을하는 데 더/가장 활성화되더라’ 정도뿐이다. 따라서 최소한 공존은 가능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건 아직까지도 '불가능'이다.
2. 가만보면 인간을 한심한 존재로 깎아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해주는 내용이다.
에필로그의 제목을 보면 'Reinventing ourselves'라고 지어놨는데, 다음 2가지 함의가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a) 사실 마인드가 flat하든 말든, 우리의 자기발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우리는 그저 더 정확히 우리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b) 우리의 의식에서 발생한 어떤 결심, 믿음, 생각, 결정은 그 찰나에 연속적으로 제공 및 해석된 내용에 따른 결론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행동이나 생각, 신념에 있어서도 나 자신에 대한 온전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당신이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못하도록 발목잡을 더 심오한 추상적 존재는 없다.
적어도 내가 스킵한 챕터에 관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다시 들여다볼 것 같지 않은 책이지만, 그래도 한줄 한줄 이해하며 읽어가면서 중간중간 내 대뇌피질이 만든 나만의 인사이트를 줍줍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던 독서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