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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고 싶으면서 잃기는 싫은 마음

이럴 수가. 인지 기능 저하가 심각하다.

by 은연주

우울증 걸린 후에 인지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 이러다 조기 치매 오는 거 아니냐고 농담 반 걱정 반으로 말할 정도였다. 평소에 가끔 딴생각하느라 멍할 때도 있지만 이건 확실히 아예 다른 증상이었다.


예를 들어서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는데, 3권의 책을 빌리고 에코백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왔다. 그런데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어깨가 허전하더라. 도서관에 책 빌리고 가방을 그대로 놓고 온 것뿐이랴.


하루는 집에 가는 길에 항상 타던 버스를 탔는데, 반대편 정류장에 타서 완전 반대 방향으로 20분이나 간 적도 있다. 카톡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던 것도 아니고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었는데 못 알아챘을 뿐이다.


어디 가서 휴대폰이나 지갑을 놓고 오는 성격도 아닌데 매일 하루에 하나씩 뭐를 놓고 오거나 잃어버렸다. 병원에서는 우울증으로 인지 기능이 잠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거라고.




그러다가 결국 오퍼레터의 연봉을 잘못 봐서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까지 생겼다. 성급하게 촐싹거리고 대충 읽고 바로 사인한 것도 아니다. 메일을 받고 한 시간 넘게 메일을 보고 또 보고 계속 고민하다가 협상 대신 '이견 없습니다'하고 흔쾌히 사인을 했다. 근데 나중에 계약서를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연봉이 아니었다. 뭐지? 오퍼레터를 다시 보니 내가 애초에 연봉을 다른 금액으로 잘못 인지한 것이다.


계약서 직전에 '아 제가 오퍼레터를 잘못 봤어요. 착각했어요.'라고 말하면서 협상을 시도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다른 핑계를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경력 이직이 몇 번째인데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지?


내 착각으로 생각보다 낮아진 연봉이 아쉬운 게 아니었다. 어차피 전 직장의 연봉보다 더 깎이더라도 무조건 입사할 생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가 내 치료를 위해서 하루빨리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일에 몰입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점점 겁이 났다. 이러다가 정말 영구적으로 뇌 손상 입으면 어떡하지?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뇌의 기능적 손상까지 입으면 이걸 어떻게 남편에게 따지지?


아니 어차피 나는 따지지 못한다. 남편은 왜 그게 내 책임이냐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반박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처음 지독한 우울증에 빠졌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고 정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지금 자살하면 남편이 슬퍼할까? 후회할까? 미안해할까?'


남편의 입장에서, 남편의 심리에서 상상해 봤다. 남편은 '걔가 죽은 게 왜 나 때문인데? 내가 살해했어? 그래야 내 탓이지. 지가 스스로 죽은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라고 마음속으로 억울해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과 이 현실이 말이 되고 납득이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본인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10년 넘게 키운 강아지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남편을 보면서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캠핑 가서 남들이 버리고 간 남의 텐트 주변 쓰레기까지 줍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내가 힘들거나 울 때는 '공감'보다는 '대안 제시'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그가 나를 위해주는 방식이었다는 걸 나도 당연히 안다. 나는 이미 모든 사람은 각자 다 다르고, 너와 나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아는 나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상대방의 마음'을 상상하고 헤아리는 능력이 사실은 아예 없다는 걸 몰랐다. 역지사지, 이심전심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걸 진심으로 몰랐다.




결혼 직전 커플 상담을 받을 때, 우리는 이미 신혼집에서 동거 중이었고 각자 살아온 환경과 세월의 합을 맞춰가느라 종종 생활 패턴에서 오는 잡음이 있었다. 신혼부부들이 으레 겪는 흔하고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남편은 내로남불이 심하다는 걸 느꼈다. 심리상담사 선생님도 남편에게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굉장히 미성숙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돌직구를 날리셨다.




서로 대화를 할 때 '너의 입장은 그랬구나, 너의 마음은 그랬구나' 상상하면 어느 정도 싸울 일은 피하게 된다. 거기에 내 의견을 덧붙이면 전달력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어. 아마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아”


그럼 굳이 서로 핏대 세우면서 떽떽거리고 싸울 일 없이 감정 상할 일도 현명하게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의외로 남편은 그런 방법에 굉장히 서툴렀고, 우리가 연애할 때 부딪힌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혼을 코앞에 앞두고서야 남편의 이런 면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파혼할 생각은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나 또한 다른 부분에서 굉장히 미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와 남편도 모두 부부상담을 열심히 받는 것에 합의를 했고, 남편은 열심히 개인상담도 받았다. 그러면서 더 노력하는 게 실제로 눈에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 과정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다 내 착각이었다.




사실 그의 노력은 그가 영원히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것들이 아마 그에게는 스트레스나 마음속 불만으로 남았을 것이다. 애초에 안 되는 부분을 계속 연습하고 노력한다고 결국 그게 될까?


남편이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공황장애가 오고, 우울증이 오고, 매일같이 자살 생각을 하고, 내가 이미 망가지고 나서야 알았다.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늦게 안 것, 그래서 내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거겠지.




어제는 병원도 가고 심리상담도 있는 날이었다. 병원에서 내 오퍼레터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에 뭔가를 타이핑하셨다. 선생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따스함이 들어있다. 선생님이 내 마음에 공감해 줄 때는 등을 쓰다듬어주는 느낌이고, 현실적인 조언 내지는 팩폭을 하실 때는 정신이 번쩍 든다.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 굉장히 잘 잡힌 건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내게 새로운 약을 처방하셨다. 기존에 먹던 항우울제보다 훨씬 더 인지 기능 저하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고. 병원을 나와서 약 이름을 네이버에 검색해 봤다. 제일 먼저 뜨는 검색 결과가 '치매 노인을 사랑하는 모임' 순간 심장이 철렁, 동요될 뻔했지만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새 출발을 앞두고 얼른 약 효과가 나타나서 정신줄 똑바로 붙들고 싶다. 머릿속에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뿌옇다. 사람 마음이 참 웃긴 게 그렇게 죽고 싶다가도 막상 인지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니깐 덜컥 겁부터 난다.


나를 잃고 싶지 않은데 이러다가 내가 누군지 내가 모르면 어떻게 되나. 세상에서 영영 잊히고 싶다가도 나를 잃기 싫기도 하고. 마음이 참 어지럽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겨울 비는 하루종일 퍼붓는다. 한울도 나를 어엿비 너기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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