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는 거지. 그런 거겠지.
출근길에 우산을 썼는데도 비를 쫄딱 맞아서 하루종일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축축한 바짓단을 질질 끌고 앉아서 일하는데 마치 1년이 다 되도록 하나도 해결된 게 없는 내 상황 같아서 찝찝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서울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서울 땅바닥은 풀 한 포기에도 잿빛이 묻어있는 것 같다. 좋은 날이 있으면 안 좋은 날도 있는 거지 뭐.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촉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하루종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온라인 법원 나의 사건 검색에 들어가 보니 오늘 날짜로 남편이 변호사를 선임했다. '4월 15일: 원고 소송대리인 땡땡땡 소송위임장 제출' 소송장에는 과연 무슨 말이 쓰여있을까. 말도 안 되는 괴이한 이야기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을 하니 공황발작이 다시 시작한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너무 고통스럽다.
햇살 쨍쨍한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건조기 대신 햇볕에 빨래를 손수 널고 마당에는 강아지가 뛰노는 목가적인 삶을 상상하며 꾸역꾸역 만원 지하철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내가 초라하다. 커리어가 뭐라고. 이까짓 월급이 다 뭐라고. 나는 허상뿐인 남편과 싸워야 하는데 왜 일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마 이거라도 없으면 정말 얼마나 더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질지 모르겠어서 일단 동아줄을 꼭 붙들고 있는다.
제발 다 끝났으면 좋겠다. 내 진심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준 대가가 이렇게 크다는 게 힘겹다. 법정스님의 말씀이 맞았다. 나는 함부로 인연 맺은 벌을 이렇게 가혹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중략...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법정 스님 말씀 중-
살고 싶어서 끄적이기 시작한 몇 글자들은 얼기설기 얽혀 이제 제법 그럴싸한 글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래서 나는 지금 살만한지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내가 잃은 것이 너무 많다. 고소장을 받아서 읽을 생각을 하니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