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inshallah 인샬라!

나는 그저 심지 굳은 뿌리로 있을 수밖에 없다.

by 은연주

미친 남편이 뭐라고 써놨을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온통 나에게 투사하고 있다. 소장을 받고 읽는 상상만 해도 호흡곤란이 온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 했다. 그들은 나와 내 부모에게 진심으로 미안할까. 아닌 것 같다. 모두 무책임하다. 속마음을 도려내서 까볼 수도 없고 어쩌다가 이런 일이 내 인생에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마감인 중요한 과제가 있었는데 제대로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미완성 상태로 제출해 버렸다. 나는 정말로 남편의 치료에 차도가 있다면 조금은 뉘우쳐서 좋게 이혼을 하고 싶었다. 세상에 좋은 이혼이라는 건 없겠으나 그래도 최악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악 중 최악을 만났다. 비정상인 남편이 껍데기를 멀쩡하게 연기하며 나를 속여온 것도 기가 막힌데 이제는 그걸 숨기지도 않고 폭주하는 모습이 내게는 정서적 학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묘하게 상황을 조작하고 악의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그에게는 정말 인간다움이라는 게 없는 걸까. 스스로 열등함을 인정해서 이제 인간이기를 포기한 걸까. 왜 멀쩡하게 행복했던 집안을 순식간에 쑥대밭 만들어놓았는지 남편과 그의 가족이 밉다. 그리고 그 미움은 곧바로 내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이런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는 스스로가 역겹다. 나는 그동안 평생 세상을 너무 순수하게 바라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자학에 가까운 자책은 나를 또 눈물 흘리게 만든다. 이제는 피눈물이 아니라 거의 썩은 고름 같다. 사람의 눈물이 곯을 수 있다는 걸 홍길동 때문에 알았다. 갑자기 이 순간만큼은 그의 실명 세 글자와 그의 가족에 대해서 확 까발리고 싶다는 충동심이 올라왔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증오와 적개심이라는 감정이 나를 조용히 감싼다.




아빠에게 어제 남편이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나는 카카오톡에서도 글자로 공황발작이 온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문장의 어순이 안 맞았다. 아빠는 다분히 침착하게 답장을 보냈다.


- 아니 어쩌다가 나한테 이런 일이..? 도대체..?

- 중심 잡아. 너한테 이런 일이가 아니야. 그냥 그런 일인 거야. 너 자신에 집중해. 그냥 사무적으로 절차적으로 처리해 가야 할 일이야. 그리고 너의 본질에 집중해. 명상하면서 네 호흡에 집중해야 돼.


아빠 말이 맞다. 이건 그냥 그런 일이다. 애초에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의 벌은 내가 아니어도 하늘에서 내릴 것이다. 아빠 답장을 보자마자 땅에 발 붙이지 못하고 붕 떠서 갈피 잡지 못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빠의 말을 계속 되새겼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을 때마다 뿌리가 땅에 깊게 박히는 느낌이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고 모든 것은 우주의 법칙대로 흘러간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태풍이 찾아오고 해일이 덮쳐도 단단히 뿌리내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


인샬라!

인샬라!

인샬라!


inshallah. 남의 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지만 마치 내 나라 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유난히 더 마법 주문처럼 들린다. 인샬라, 모든 건 신의 뜻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