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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이 필요할 때마다 광화문에 간다.

광화문 에너지 부스트!

by 은연주



오늘 낮에 광화문에 다녀왔다. 종로에 참으로 오랜만에 갔다. 2년? 3년 전쯤 남편과 한창 데이트할 때 종로 뒷골목에 술 마시러 간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봄은 원래 뒤돌아서면 사라진다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무심코 경복궁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광화문에 가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차분해지는 느낌의 안정보다는 마치 용기가 채워지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제일 가고 싶었던 대학의 수시 논술 전형에 1차 합격했다가 결국 최종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다시 정시를 준비해야 했을 때 심란한 마음에 혼자 광화문에 갔다. 경복궁 담벼락을 따라서 걷다가 교보문고에 가서 철학 책도 한 권 샀다. 당장 수능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탈락의 속상한 마음은 광화문 나들이 한 번에 금방 날아갔던 것 같다. 그 후 정시는 꽤 잘 봤고 대학도 잘 갔다.




오늘은 한낮 기온이 거의 30도에 가깝게 치솟았다더니 도심의 모두가 한여름 옷차림이었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주말의 광화문에는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있는지 새삼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경복궁에는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온 건지 추측하기 어려운 이국적인 외모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 수많은 외국어.


그들 사이에 섞여서 경복궁을 걷고 있자니 왠지 평소에 광화문 올 때 보다 더 힘이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내가 이들을 모르듯이 이들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겠지. 그럼 내 고민은 더욱 별게 아니고 하찮은 거라는 발칙한 생각까지 들었다.


옛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울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경복궁 터를 골랐을까. 풍수지리도 모르고 역사에 해박한 것도 아니지만 확실한 건 광화문에 갈 때마다 내 기운이 밖으로 쫙쫙 뻗치는 기분이 든다. 한 나라의 궁궐을 짓는데 행여나 음기나 쓸데없는 나쁜 기운이 들러붙는 곳은 다 피했을 것이다. 양기가 들끓는 곳, 영원한 에너지의 정수와도 같은 곳에 궁을 지어야 나라가 잘 될 거라는 생각을 했겠지. (비록 슬프게도 조선의 최후는 비참했지만)




믿거나 말거나 적어도 나만의 셀프 임상 결과에 따르면 우울감이나 무기력에는 광화문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주말마다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광화문에 가서 에너지를 넘치게 충전하고 오니 왠지 힘이 난다. 게다가 광화문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서 마음이 편했다.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었다.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걷는 이방인1처럼 아주 당당하게 광화문을 누볐다.


문득 이 글을 읽는 무명 씨에게도 궁금해졌다. "당신도 몹시 힘들 때마다 용기를 얻기 위해서 가는 곳이 있나요? 이상하게 그 장소에 가기만 해도 왠지 기운에 힘이 느껴지는 곳이 있나요? 그곳이 어디든 당신 마음속에도 언제나 광화문 같은 곳이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에서 가득 채우고 온 양기로 다음 한 주도 잘 버텨내야지. 光化門, 이름처럼 빛이 널리 비추는 그 힘이 부디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전달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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