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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인생은 오미자 맛인 것 같아.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게 뭐라도.

by 은연주



남편이 3년 동안 정신이 아픈 걸 속이고 나와 결혼하자마자 평생 써온 가면을 벗었을 때 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이 절반은 나가있었다. 지금이야 애라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나지막이 위로라도 건넬 수 있었지만, 그때는 진짜 넋을 놓고 걷다가 오토바이에 치여 죽어도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멘탈이 완전히 뭉개져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으깨진 순두부 같았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잘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 앞에서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부리지 않은 이유는, 미친놈보다 더한 미친년이 되어 시댁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은 건 아마도 내 피에는 남편 같은 공격성이 흐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평소에 그다지 다혈질이 아니었음에도 특정 주제에 쉽게 발작 버튼이 눌려서 욱했다. 원가족 이슈가 나오면 갑자기 불안해지듯 화를 내기도 했다. 남편 내면의 해소되지 않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방어적으로 더 화를 낸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알 수 없는 상처받은 남편이 짠했고 그의 상처까지 사랑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살기 마련이니깐. 나는 남편의 못나고 부족한 모습까지 다 품어주기로 했다. 그게 내가 엄마 아빠에게 배운 사랑이었다. 가족은 그런 거였다. 조건 없이 존재 자체로 무한하게 줄 수 있는 사랑.


남편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 보고 스스로에게 화해의 악수를 한 번이라도 건넸다면 그는 지금처럼 처치 곤란의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남편은 자기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폭주해서 그의 가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정신병동 보호입원을 한다고 해도 치료 효과가 크게는 없겠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옳다고 굳게 믿는 남편은 지금 아무의 말도 듣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젖 먹던 힘을 다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성실하고 독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전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성실과 불성실의 중간쯤에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 욱하는 다혈질은 없었지만 대신 베짱이나 한량의 피가 적당히 흐르고 있었다. 만약 조선시대 사대부로 태어나서 남도 땅 끝으로 귀양을 갔더라면 그 시간을 고통으로 물들이지 않기 위해 꽃과 나비를 보며 시가를 지었으리라.




결혼이라 쓰고 사건이라 읽는 그날 이후로 열심히 기를 쓰고 한국을 벗어나면서 여행 다녔다. 새끼발톱이 빠질 만큼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눈물은 도통 마르지 않았다. 정신줄 놓은 혼령처럼 외국을 떠돌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오면 또 열심히 꼬박꼬박 병원에 가고 상담에 갔다. 몸에 좋다는 건 다 했다. 지리산 천왕봉을 무박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너무 무리해서 산을 탄 나머지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나는 원래 분명 작심삼일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그만큼 내가 남편을 잊기 위해서 애썼다는 뜻이다.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전례 없는 커리어우먼처럼 밤새 일만 했다. 이제 막 결혼한 사람이 남편 따라 외국에 갔다가 자기 커리어 때문에 혼자 짐 싸들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놀랐는데, 그런 내가 미친 듯이 야근만 하니깐 회사 사람들은 나를 독한 년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독한 년 맞다. 이 정도로 독하지 않았으면 현실의 고통이 훨씬 더 아프기 때문에. 이렇게 뭐라도 열심히 계속하니깐 노력도 배신하지 않는 걸까.




내 커리어에 아주 작지만 좋은 일이 있었고, 그 결과를 떠나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독한 년처럼 잘 버텨왔는지 인정받는 계기였다. 형식적인 말일수도 있겠지만 칭찬도 들었다. 그러니 노력은 정말로 배신하지 않는다. 우울도 마음껏 끌어안고 있는 힘껏 우울해보니 이것도 다 도움이 된다. 엄마 아빠가 말했던 어른의 인생이 이런 건가 보다. 우울도 잘 쓰면 예술가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단지 뭐든 열심히 한다는 전제 하에.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아파하고 열심히 행복한 만큼 열심히 우울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진짜 인생. 그 맛은 오미자 같은 거 아닐까.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다섯 가지 맛이 한 번에 다 느껴져서 오미자라는 열매처럼 말이다. 매일 열심히 현존하면 절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P.S. 부디 결과도 좋았으면 좋겠다. 나 그간 정말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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