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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un 09. 2024

감기 걸려도 좋아.

일상의 평온함


실은 현충일에 관악산을 다녀오고 난 뒤에 몸살에 걸렸다. 1년간 운동을 담쌓고 살다가 갑자기 사흘 간격으로 등산을 두 번이나 갔더니 몸에 무리가 갔나 보다. 하필이면 현충일은 서울 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서 바로 며칠 전 아빠와 갔던 산행보다 더 고행길이었다. 그날 밤부터 편도가 부어서 따끔따끔하더니 콧물과 재채기가 연신 나를 괴롭혔다.




초여름 비가 퍼붓는 토요일 아침부터 화장실 청소를 했다. 컨디션은 전날 밤보다 좋지 않았다. 화장실 청소가 끝나면 부엌 청소. 정리 정돈에는 자신 없지만 청소는 얘기가 다르다. 나는 깔끔하게 정돈하는 건 어려워도 깨끗하게 청소하는 건 자신 있었다. 그래서 맥시멀리스트보다는 차라리 미니멀리스트가 내 성향에 낫다는 생각을 했다.


열로 인해 귀도 먹먹한 느낌이라 누워서 푹 쉬어야 하는데 굳이 아픈 몸을 움직이며 미련하게 사서 고생을 했어도 청소를 끝내놓으니깐 마음은 가뿐했다. 그 사이 비가 그쳐서 강아지 산책도 나갔고 돌아오는 길엔 좋아하는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도 한 잔 마셨다. 물론 편도가 많이 붓고 코도 꽉 막혀서 평소만큼 커피 맛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꽤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예정대로 저녁 약속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전날 밤만 해도 아프다고 약속을 취소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감기 따위에 지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세우고 투자나 이직에 대한 건전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빠 말이 맞았다. 환경이 변하는 거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아빠는 그 말을 사건 직후 불안에 가득 찼던 전남편에게 했다. 내게 한 말도 아닌데 묘하게 그 말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의 본질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인 것 같다. 상황이 아무리 궂어도,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몸 상태가 아무리 아파도, 나는 나다.




감기 걸리면 마음까지 비실비실해야 하는데 어쩐지 활력이 넘치는 것 같은 주말이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나름대로 감기를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 어제보다는 30% 정도 컨디션이 괜찮아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친구들과 갔던 카페에서 포장해 온 빵으로 배를 채웠다. 오늘의 기분과 태도를 고르듯 신중한 마음으로 캡슐을 골라서 커피까지 뽑으니 하루의 시작이 좋다. 이따 오후에는 가고 싶었던 요가원 원데이 클래스에 간다. 요가를 다녀와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빨래를 돌리고 회사일을 마무리해야지. 오랜만에 느끼는 것 같은 일상의 평온함. 감기 걸려도 한없이 평화로운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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