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던 이 나라에 돌아왔어요.
나는 지금 눈앞에 산이 병풍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계곡 사이로 가파르게 난 비탈길을 내려다보는 세상의 꼭대기에서 브런치를 쓰고 있다.
이곳은 전남친도 전남편도 현남편도 그 무엇도 아닌 홍길동 때문에 결혼이주를 하게 될 뻔했던 나라이다.
작년 여름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한국에 돌아온 뒤로 다시는, 영원히, 절대로 이 땅에 스스로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질없고 나약한 게 사람 마음이라도 되는 듯이 여러 해가 지난 것도 아닌 고작 1년 만에 다시 찾게 될 줄 몰랐던 남의 나라.
지난달 친구는 내게 10월 연휴에 뭐 하냐고, 같이 여행 갈 생각 없냐고 물었다. 어차피 할 것도 없고 어떠한 욕구도 다 죽어버린 나로서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단지 특이점은 친구가 제안한 목적지는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홍길동의 나라였다.
- 니가 뭘 잘못했어. 그 땅도 아무 잘못 없지. 다 홍길동 잘못이잖아. 같은 나라긴 해도 우리는 정반대에 있는 도시로 갈 거고, 오히려 니가 그 나라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3.3제곱미터의 심리적 장벽을 쌓고 그 안에 나를 밀어 넣었다.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나 자신이 퍽 밉던 즈음이었다. 누군가 나를 조심스레 밖으로 꺼내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친구는 내 결혼식에서 진심을 꾹꾹 눌러쓴 축사의 주인공이었다. 나와 홍길동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응원해 준 사람이었고, 평소에도 영원한 사랑을 신화나 판타지처럼 숭배하는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홍길동은 그녀의 축사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의 눈물이 연기였는지 순간의 분위기에 취한 감정의 배설물이었는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친구와 나는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곧 내 브런치를 읽을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비행기가 뜨는 순간까지도 이 여행을 떠난 것을 후회했다. 혼자서 공항에 오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출국 수속하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후회 따위의 끈적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하필 내 스케줄에 맞는 비행기는 대한항공도 아시아나도 아닌 그 나라의 국적기였다. 홍길동과 연애 시절부터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수도 없이 많이 탔던 이 항공사의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부터 내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를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나라 말로 떠드는 기내 안내 방송이 귓가에 꽂히자마자 코끝이 매워졌다.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니. 구질구질한 내가 너무 싫다.
손가락으로 코끝을 꽉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눈물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귀신같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눈물 아니면 공황발작. 내 마음은 왜 이리도 약해빠졌을까.
파우치를 주섬주섬 뒤져서 공황장애 약을 뜯었다. 그래도 내심 대견한 마음도 들었다. 약 봉투에는 ‘필요시 복용’이라고 쓰여있었는데 근래 들어 공황발작 약을 먹었던 기억을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꽤 긴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공항 입국장을 거쳐 나갈 때도 또 한 번 고비가 있었다.
나도 까먹고 있었던 이 나라의 거주 비자.
입국 심사를 하던 무표정한 공무원은 내 여권을 낱장 하나하나 넘겨보더니 마지막에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Welcome Back!“
Back-이 주는 어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작년 여름으로 끌려간 것 같았다. 비디오테이프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속수무책으로 과거에 저당 잡힌 것 같은 불쾌감.
짐을 찾고 입국장을 빠져나가서야 아는 얼굴을 보고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돌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