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연주 Oct 06. 2024

홍길동의 나라가 이제 힘들지만은 않아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큰 용기와 작은 시도




우리는 무턱대고 감히 이 나라에 오긴 했지만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도시를 벗어나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쳐서 가만히 숨어있기로 했다. 시내를 빠져나가 차를 타고 여섯 시간 넘게 달려야 닿는 첩첩산중.


분명 이곳은 작년의 그 나라인데 같은 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온 것처럼 신선 세계 같은 태초의 자연 앞에서는 내 마음속 지옥도 겨우 작은 티끌이었다.




보름 뒤에 있는 법원 가사조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보다 홍길동을 마주하고 내가 그대로 기절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제 소원해진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내 짐들과 골치 아픈 현실은 어떻게 정리할지


그동안 나는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사서 괴로움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쉬었다 가자고,

아무 생각 말고 산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걸린 구름을 쳐다보라고,

안개가 걷히고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과 선명한 은하수를 보라고,

긴 비행을 끝내고 서울로 가볍게 돌아가던 옛날과 달리 지방행 리무진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또다시 여행을 하는 것처럼 아직도 내가 달릴 날들이 무척 많다고,

이러나저러나 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나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준 시간들이었다.




교통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지고 내겐 결혼이 그랬다. 영문도 모른 채 영혼이 살해당한 기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허송세월했다.


그러는 사이 물에 물감을 풀어놓듯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우울증은 서서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어느덧 우울이 나를 완전히 가져버렸다. 몸에 좋다는 것부터 마음에 좋다는 것까지 다 해봐도 차도가 없었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 이제는 어떻게든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군가에게 ‘남들은 행여나 자살시도 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인데 그러지 않아서 너무 고맙다고. 열심히 살아있어 줘서 너무 대견하다.‘는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역설적이게도 그럼 이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나는 욕심이 많은가 보다.

죽자고 해놓고선 홍길동의 나라에 제 발로 가서 힘든 마음을 또 한 번 버리고 왔다.


1주일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그 나라가 예전만큼 처절하지는 않다.


나는 지금 여기 생생히 숨 쉬고 있으니깐.



아주 잘 살고 싶다.




이전 10화 기억은 지우는 게 아니라 새로운 추억으로 덮는 것이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