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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Oct 17. 2024

"저 남자 정상 아니에요. 정신병자랑 싸우지 마세요."

가사조사 그 후 : 가사조사관의 한 마디에 나는 오열했다.


이제부터 각자 개인 면담을 할게요. 홍길동 씨는 잠깐 나가 계세요.


207호 문이 닫히자마자 가사조사관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제 말 오해 말고 들으세요. 제가 인생 언니, 아니 이모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정말 이혼 안 하실 건 아니죠? 꼭 이혼하셔야 돼요. 저 남자 정상 아니에요. 아까 제가 얘기할 때마다 팔짱 끼고 제 말 무시하면서 안 듣는 거 보셨죠? 저 남자 안 고쳐질 것 같아요. 저런 사람은 남 말 절대 안 듣고 자기가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해요. 제가 이 일 하면서 사람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저 사람은 판사 말도 안 듣고 의사 말도 안 들을 거예요. 자기 말이 정답이라."


나는 순식간에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두서없이 해명 아닌 해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사관님, 원고 말처럼 저희 집 못살지 않아요. 시댁은 사업을 하니깐 다르긴 해도 사회적 시선으로 보면 양가 다 여유 있어요. 저희 **호텔에서 결혼했고 그런 결혼 비용도 다 반반 했어요. 이런 말씀드리는 것도 너무 구차한데 저희 아버지 직업은 **예요."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소장이랑 진술서만 미리 읽어봐도 저 남자가 아픈 사람이라는 거 다 알거든요. 말이 안 되니깐. 저 사람은 자기 말을 정답처럼 만들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다 할 거예요. 환자랑 싸우는 거 아니에요."


"근데 시아버지랑 저희 아빠가 만나서 조정이혼으로 처리하기로 했는데 원고가 왜 갑자기 소송을 걸었을까요. 저 정말로 소송 안 하고 싶어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제가 소송을 걸면 걸었지, 저는 빨리 조용히 헤어지고 제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그랬잖아요. 저 남자는 자기 말이 법이고 자기가 왕이라고.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끼어들면 자기가 거기 끌려가는 상황이 되니깐 그랬겠죠. 시아버지가 나섰다는 건 자기 자식 아픈 거 인정하고 빨리 뒤처리해 준다는 걸 텐데, 그래서 지금은 부모님들끼리 이야기가 어떻게 됐죠?"




밤새 뒤척였고 한숨도 못 잔 상태로 아침이 되자마자 정신과로 향했다. 오후에 가사조사가 있다고, 잠을 하나도 못 잤고, 너무 무서워서 생각만 하면 자꾸 공황이 온다고.


내가 걱정됐는지 아빠와 동생도 법원에 따라왔다. 1층 로비에서 1년 3개월 만에 홍길동을 마주쳤다. 내게 사랑한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는 홍길동에게 먼저 웃으면서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악수를 건넸다. 홍길동은 대답 없이 마지못해 손을 겨우 잡더니 나와 동생은 본 척도 안 하고 계단을 쌩 올라갔다.




가사조사관은 오늘 이 자리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우리 두 사람이 어떤 판결을 받고 싶은지 물었다.


"저는 당연히 이혼이 하고 싶고요. 제가 청구한 위자료 3,000만 원도 받고 싶습니다."

홍길동이 답했다.


"전 이 청구가 기각되길 바랍니다. 이혼을 하더라도 대화를 해서 협의를 하든 조정을 해야지 저는 이 싸움은커녕 이혼 사유도 여전히 납득이 안 돼요. 작년부터 계속 우울증에 시달리며 지금도 힘듭니다. 이 소송을 원하지 않아요"

이어서 내가 대답하는데 홍길동을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 피식피식 이죽거렸다.


조사관은 홍길동에게 지금 뭐 하면서 지내냐고 일은 하냐고 물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저는 회사 다니고 있습니다."

월 수입은 어떻게 되시죠? "세후 *** 법니다."

내 대답을 듣고 홍길동이 나를 놀란 듯이 쳐다봤다. (내가 너보다 능력 있어서 놀랐니?)




홍길동은 이혼 사유로 내게 신뢰가 깨졌다고 강조하면서 신뢰를 깨트린 사람과 어떻게 남은 생을 같이 살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뢰가 깨지게 된 계기에 대해 소장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조사관의 질문에 홍길동은 교묘하게 자기 위주로 내용을 편집해서 말했다. 번호까지 붙여가며.


"첫째, 아내가 저 몰래 마약을 운반했고요. 제가 하지 말라고 싫다고 했는데. 저희 아버지도 그건 마약이 맞고 문제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요. 제가 무역 회사에 다녀서 이게 세관에서 문제가 되면 앞으로 공항에 못 갈 수도 있고요. 실제로 제 친구 중에도 마약으로 문제가 돼서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못 가게 된 친구가 있어서 잘 압니다." (야 니 친구는 실제로 마약 해서 문제 된 거잖아.)


"두 번째로, 저희가 결혼할 때 몇 가지 구두로 합의를 했어요. 딩크를 하기로 했는데, 결혼하자마자 이야기가 바뀌어서 계속 아이 얘기를 꺼냈고 (????) 예물예단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와이프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제가 그런 부분을 배려한 거죠. (????) 근데 뒤에서 저희 엄마한테 2700만 원짜리 시계를 몰래 받았더라고요? 그걸 끝까지 몰래 숨기다가 해외 이삿짐 풀 때 제가 발견했어요. 그리고 장모님도 저한테 시계를 사주신다고 그래서 저는 시계가 필요 없는데, 그걸로 3일 밤낮은 싸웠어요."


"세 번째로, 해외 이사를 할 때 저는 이미 해외 근무 중이라서 제가 이삿짐을 쌀 시간이 없었는데-"


"네 됐습니다, 그만하셔도 되고요. 말씀하신 사유는 이혼 사유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은연주 씨 이 부분에 하실 얘기 있으세요?"


"진술서에 쓰여있듯이, 마약이 아니라 시어머니 심부름이었고 시동생의 동물의약품이었어요. 사람들이 해외여행 갈 때 복용하는 약 들고 가듯이 생각했고요.

시계 2700만 원짜리 아닙니다. 저희 엄마도 사위에게 시계 하나 사주고 싶어 하셨지만, 본인이 시계는 싫다고 해서 나중에 한국 돌아오면 카니발 사달라고도 했어요. 그걸로 싸운 적 없습니다. 예물예단이라는 게 자식 결혼시키는 부모님들의 마음도 있잖아요. 시어머니가 본인 시어머니에게 받은 투박한 오팔 반지 같은 걸 목함에 보관하시다가 제게 물려주셨어요. 부모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이혼 사유가 될 정도로 잘못인가요?"


"네 여기까지 들을게요. 홍길동 씨는 한국에 와서 병원에 가셨다고 하는데 병원에선 뭐라던가요?"


"부모님이 하도 너 가봐라 문제 있다고 하셔서 하는 수 없이 **대병원 가서 5시간이나 걸리는 무슨 정신 검사까지 다 받았는데, 아무 문제없다고 정상이라고 나오더라고요. 제가 원래 불면증이 있어서 우울증 약을 좀 처방받았는데, 그게 다예요. 저는 지금 아무 문제없습니다."


니 풀배터리 검사 결과지 다 봤다고, 연극성 성격에 반사회성, 자기애성 성격이 쓰여있더라는 이야기는 차마 보복이 무서워서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 침을 삼켰다.



 

1시간 남짓의 조사가 끝나고 가사조사관은 나를 따로 부르며 자기가 보고서를 쓰면 그건 판사만 볼 수 있고 아무도 못 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어쩌다 이런 안 겪어도 되는 일을 겪냐며 안쓰럽다고, 근데 더 좋은 사람 만나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어깨를 토닥여줬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중한 분들의 간절한 기도와 아침에 받아온 자나팜, 인데놀 덕분이었을까. 나는 홍길동 앞에서 내내 침착했다. 단지 가사조사관을 독대하는 순간에만 긴장이 풀려서 오열했지만.


끝나고 나 때문에 같이 마음고생한 아빠와 동생에게 소고기를 사줬다. 나는 씩씩한 척을 했지만 사실 많이 힘들었는지 맛있는 꽃등심을 먹고도 서울역 화장실에서 다 토했다. 지금은 내일 출근을 위해 곧장 내려가는 중이다.




괜찮아. 잘했어 연주야.

법정에서 받은 판결문은 아니었지만, 가사조사관의 지지와 위로만으로도 억울함이 조금은 풀릴 수 있을까.


아니. 내 억울함은 니가 죽어도 절대 안 풀릴 것 같아. 길동아, 그러니 너는 평생 니가 만든 그 지옥에서 세상을 불행하게 보면서 살거나, 우연히 각성한 뒤에 니가 한 짓들에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겠지. 나는 그런 너를 계속 불쌍히 여길 거야.




오늘 그를 마주하고서야 확실히 느꼈다.

나는 더 이상 홍길동을 완벽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목숨만큼 아꼈던 사랑이 그깟 사랑으로 변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고 슬픈 일이다.


나는 사랑의 가치를, 사랑하는 법을,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 싸움에서 이겨도 이긴 게 아니라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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