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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Oct 28. 2024

다가오는 연말이 싱숭생숭한 건,

벌써 두 번째 연말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낯선 동네의 새 아파트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간밤에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놨다. 약속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을 내가 걱정되어 전날 놀러 온 동생이 하룻밤 자고 가는 덕분에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였다.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몸뚱이는 분명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붕괴되어서 영혼이 여기에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행운목 화분의 잎처럼 버석거리는 마음으로는 이 세상 무엇을 봐도 슬프고 우울했다. 창밖으로 아파트 중정에 썰매 끌러 나온 아빠와 아이들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 손잡고 눈길을 조심히 걷다가 눈을 던지고 장난치는 중년 부부를 볼 때쯤에는 코끝이 너무 맵다 못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모두가 안녕하고 무탈한 크리스마스라서 나는 무척 괴로웠다. '작년에는 같이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요리를 해 먹고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케이크를 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버둥거렸다.




찬바람이 불고 해가 빨리 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쉽게 조급해진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벌써 연말이라니. 내가 한 해 동안 이룬 것들을 돌이켜보거나 아쉬웠던 점을 반추해보기도 한다. 작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올해도 작년 못지않게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작년에 나는 결혼을 했고 퇴사를 하고 남편 따라 해외이민을 갔으나 혼인신고 하루 만에 남편이 이상해져서 정서적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나를 데리러 온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귀국했다. -이 많은 일들이 한 문장에 들어있는 건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마일리지 털어가며, 모아둔 적금 깨 가며 방황하듯 여기저기를 스쳐 지나갔다. 절에도 들어가 보고 남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쪽잠을 청하기도 했다.


올해는 운 좋게 다시 취업을 했고, 회사를 다니며 신혼 연기를 하는 게 숨 막혀서 서울을 버리고 지방 도시로 또 한 번 이직을 했다. 날 닮은 강아지를 입양했고 결혼 생활이 없었는데 이혼녀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난생처음 법원에 방문해보기도 했다. 변호사를 고용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든다는 것도, 전문직이 최고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수도권을 처음 떠나본 사람으로서는 차라리 외국에 사는 게 더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일 문화 충격도 느끼고 있다.


1년 넘게 먹은 정신과 약은 그동안 계속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가 했다. 정신과 약이 나를 고쳐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약을 먹는다는 행위에서 오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병원도 열심히 나갔다. 보름에 한 번씩 운전해서 서울까지 올라갔다. 가끔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를 탈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시간이 더 걸려도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운전을 선호했다. 아마 서울에서 거제통영까지 매주 캠핑을 다녔던 연애 시절에 이미 훈련돼 있어서 버틸만한 걸 수도 있다. 이렇게 무심하게 홍길동이 떠오르면 또 속이 거북해진다.




약 열흘 전 있었던 가사조사에서 홍길동을 1년 3개월 만에 조우한 뒤로 외줄 타듯 힘겹게 버티고 있던 내 자아는 한번 더 깨졌다. 어쩌면 나는 거제도에 혼자 내려가서 지내는 홍길동에게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대학병원 치료를 어쨌는지 알 방도가 없지만, 사람이 이렇게 안 좋아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홍길동의 상태는 심각했다.


결혼을 준비하며 동거하는 기간까지 합쳐서 그 어떤 순간에도 이상했던 적이 없었던 만큼 내 충격은 더 컸다. 당연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나는 홍길동만큼 '티키타카'가 잘 되는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홍길동이 연애하면서 했던 감동적인 말들은 모두 다 내가 했던 말들이고 내 생각이었다. 지금 알았다 한들 이미 시간은 훌쩍 지났고, 그동안 내 상처는 더 짙게 곪았다.


가사조사가 끝난 직후의 나는 꽤 위태로웠다. 홍길동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동안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애꿎은 내 인생만 2년이 다 되도록 축났다는 현실에 그만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며칠분의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술과 함께 복용하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재단되지 않은 엉성한 감정들을 배설했다. 내가 이리도 엉망인데 회사에 가서 뭐 하냐는 생각에 며칠간 출근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의 내게 너무 화가 나고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샤넬백을 충동구매했다. (큰돈 써놓곤 이거 혹시 조증 아니냐며 이러다가 양극성장애가 될까 봐 걱정하느라 가방을 사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계절이 연말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파티를 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을 나누는 연말만의 느낌이 좋았다. 연말이면 항상 스누피 캐럴 재즈를 틀어놓고 차나 와인을 마셨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분이 나질 않는다. 내 마음이 이리도 약하다는 사실은 자꾸만 패배감에 젖게 만든다. 여전히 눈물이 멎지 않는 내가 끔찍하게 지겹다. 1년이 훌쩍 지나도 우울증이 들러붙어있어서 심경이 불편하다.


있어본 적도 없는 남편이 빠진 두 번째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연말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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