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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Nov 24. 2024

동생은 결혼을 했고, 나는 이혼을 하고 있다.

그날 동생의 결혼식에서 나는 신랑 어디 있냐는 질문을 101번쯤 들었다.



11월에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정말 평일이고 주말이고 계속 서울에 갔다. 출장도 두 번이나 있었고 늘 그렇듯 정신과 예약도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사건은 바로 동생의 결혼식이었다. 동생은 일찍부터 결혼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로망 따위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연은 따로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반쪽을 만난 동생은 문득 정신 차려 보니 결혼 준비 중이었다.


동생의 결혼 준비를 옆에서 지켜보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나도 거쳐갔던 과정인 것 같은데 결과가 실종되는 바람에 모든 게 어중간해진 상황. 마치 페이지가 찢겨나간 남의 책을 줄거리만 급하게 훔쳐 읽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동생 결혼식을 도와주려고 나도 결혼식 했었나 보다, 하는 K-장녀식 정신승리로 마음을 다독이고 동생 결혼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겼다.


사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다. 단 한순간도 남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야만 겨우 조그맣게 날숨 내뱉으며 숨 고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우울증이 오래되면 기억력도 감퇴한다는데 나는 작년 가을에 이미 조기 치매를 걱정할 수준으로 기억력이 나빠져서 관련 약을 먹고 있다.




동생의 결혼식날, 부모님 옆에 서서 하객 맞이 인사를 할 때 부모님 지인들은 나를 보며 "작년에 결혼했지? 신랑은?" 하고 반갑게 물었다. 다행히 손님이 많아서 정신없이 인사만 하며 대답을 자연스레 회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억지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인 건가. 회사에 출근할 때 일부러 결혼반지를 끼면서 남들 앞에서 행복한 신혼을 연기했던 지난날들이 나를 서럽게 만든다. 또 위축시킨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내 왼손을 쳐다보든지 말든지 반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1년 반이 지나서야 건진 작은 용기 그리고 대단한 성과다.


사실 결혼식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처럼 혼주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바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나를 알아보는 동생 친구들이 나부터 찾고, 호텔에서도 나를 찾고, 부모님도 나를 찾았다. 온갖 사람들이 다 나만 찾는 것 같았다. 주차는 어떻게 처리하면 되냐, 우리 자리를 못 찾겠다 이런 질문은 척척박사처럼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나를 당혹게 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어머 연주야~ 작년에 결혼하더니 더 예뻐졌네~ 남편은 어딨어? 좋은 소식은 아직이고?"

"너 결혼식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집안에 연속으로 겹경사가 일어나서 얼마나 좋은 일이니."

"오늘 연주 신랑 얼굴 구경하나 했는데, 신랑은 어디 있니?"

"이제 그 나라 적응 다 했겠네? 언제 들어온 거야 한국은? 얼마동안 있어?"




가까운 친척들은 내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애꿎은 엄마 아빠의 사회 동료들, 오랜 지인들한테까지 동네방네 소문날 필요는 없다.


"아 해외 출장 중이라서 저 혼자 들어왔어요."


행복한 날이고 집안의 경사스러운 기운이 가득해서였을까. 그날따라 행운은 나의 편이었다. 어른들의 당혹스러운 질문과 기습 안부인사로 절절 멜 것 같을 때마다 불특정 다수가 나를 찾아서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심부름을 시켰다. 어쩌면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은총으로 연출된 장면이었을지도.




결혼식이 시작되고 무사히 테이블에 앉아서 동생을 향해 축복하는 마음을 가득 보내고 있는데 뒤통수에 두런두런 작은 말들이 오고 가며 내 귀를 스쳤다.


"꽃장식 기본만 했다는데도 여기 고급스럽고 예쁘네. 근데 첫째 때 결혼식이 진짜 화려하고 예뻤어. 난 그렇게 꽃 많은 결혼식 처음 봤다니깐. 내가 그때 사진을 아직도 저장 중이잖아."

"어 그래? 나는 그때 못 갔어. 사진 보니깐 신랑도 훤칠하던데."

"어어. 이 집 딸들은 다 @@ 안 닮고 엄마 닮아서 미인이야. 하하하"


그들이 혹여나 나를 알아보고 말 걸까 봐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절대 뒤를 돌지 않고 앞만 봤다.




결혼식이 끝나고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몇 년 만에 본 사촌언니가 내게 위로를 가장한 폭탄을 던졌다.


"연주야 너 괜찮아? 잘 지내는 거 맞아? 너 많이 힘들었겠다. 근데 힘든 사람치곤 얼굴은 좋아 보이네?! 너 ㅁㅁ로 이사 갔다며. 조만간 너 있는 데로 놀러 갈게. 아니면 니가 서울 오면 연락해. 우리 할 말 많겠다."


나르시시즘이 철철 넘치는 언니의 말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사촌동생 결혼식에 와서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능과 상황에 대한 공감능력이 모자라다는 증거일 뿐.




동생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을 떠나는 표를 샀다. 오롯이 혼자 있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 코엑스로 달려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과 크록스를 사서 갈아입었다. 내 상견례 때 입었던 예복과 구두에 마치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던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은 그날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동생이 내 몫까지 더해서 차고 넘치게 행복했으면 좋겠는 마음 절반, 그리고 나는 내 가족이 없어서 고독하다는 마음 절반이 뒤엉킨 힘든 하루였다. 동생을 축복하는 마음은 120%인데, 그 마음이 내 상처를 건드려서 자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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