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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11. 2024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구슬퍼서 한참을 반복해서 들었다. 듣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옛날 같으면 나이 든 사람들이나 듣는 촌스러운 음악이라고 '다음'을 눌렀을 텐데. 국악 같기도 하고 민요 같기도 한 어느 위대한 소리꾼의 가락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이라니. 마음고생을 너무해서 일찍 나이 들어버렸나. 산전수전 다 겪고 더 이상 인생이 재밌지도 놀랍지도 않은 권태로운 영감 같이 회한의 정서만 남은 듯했다.




만원 버스에는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로의 시선은 어디 멀리 가지 못하고 다들 그저 앞사람 뒤통수나 자기 손 안의 작은 화면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에 마음 놓고 눈물을 떨궜다. 지난해 내내 앞으로 살면서 흘릴 눈물들을 모두 빚내본 결과, 밖에서 눈물이 갑자기 터질 때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 안 된다고 경험으로 터득했다. 그러면 순간 주변의 시선이 잠시 내게 고정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게다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무개 씨의 어색함이 내게 피부로 와닿기 일쑤였다.


도우루강의 해넘이를 기다리는 군중들 틈에서 눈물을 흘렸고, 택시 안에서, 비행기 안에서, 달리는 신칸센 위에서, 도서관 서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카페에서 참 아무 데서나 질질 짰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안 울고 잘 참았는데 맡아본 적도 없는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프다고 출근길 버스에서 따라 울고 있는 내가 너무 우스웠다.




며칠 전에 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 직원이 해맑게 돌직구를 던졌다.


"연주님은 기혼이세요?"


뜬금없는 상황이었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맥락에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여기랑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새로운 팀 분위기는 서로 다들 선을 넘지 않고 조심하는듯했다. 아니 회사 분위기 자체가 애초에 남한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출근한 지 아직 며칠 되지 않았지만, 다들 일이 너무 많아서 자기 일 하기 바쁜 회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회사. 내가 원하는 가장 환상적인 조건. '거 쓸데없는 스몰톡 빼고 딱 일만 합시다'


면접부터 입사하고 나서 까지 아무도 내 사생활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호구조사를 하지도 않았다. 다들 고맙게도 내 경력에서의 경험과 인사이트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어린 친구를 어떻게 하면 좋지! 내게 처음 한 질문이 대놓고 결혼했냐고 묻는 거라니.


"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일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는 본인이 먼저 선 넘는 질문을 해놓고도 내 대답이 당황스럽고 갑작스럽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네? 네?? 아니 연주님 기혼이시라고요??? 아니 결혼하신 줄 전혀 몰랐어요!!!”


순간 다른 팀원들의 관심이 내게 주목된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그 관심을 휴지에 싸서 강속구처럼 그분에게 돌려줬다.


“네. 요즘 그런 거 서로 안 물어보지 않나요? 다들 안 물어보셔서 저도 말 안 했죠. 지금 물어보셔서 이제 아셨네요ㅎㅎ“


최대한 웃으면서 무례한 사람에게 너 지금 선 넘었다고 이번에는 제대로 잘 말했다. 그리고 그분이 민망해하거나 미안해할까 봐 가볍게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저 너무 상처예요...! 보통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지 않아요? 저 지금 나이 많다고 확인사살 당한 기분이에요~! 왜 저한테는 남자친구 건너뛰고 기혼이냐고 물어보세요~ 저 나이 많아 보여요? ^^;;;“




적당히 센스로 포장해서 유희적인 분위기로 마무리했다. 덕분에 더 이상의 관심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동료분에게 개인적 감정은 없다. 오히려 그분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나보다 10살도 넘게 훨씬 어린 나이라서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때는 그랬다. 아직 어리고 사회생활도 처음이라서 뭘 모르는 때.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행복하고 즐거워서 까르르 웃던 시절이었지. 근데 이제 나는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놓아 울 수 있는 나이. 실례를 범하는 사람 앞에서 웃으면서 대처할 수 있는 연륜.




나이가 들면서 나이테처럼 상처가 많아진 건지, 내가 남편 때문에 확 늙어버린 건지 나도 모르겠다. 만약 앞으로 누가 내게 남자친구 있냐, 결혼했냐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면 되겠다고 교훈을 얻은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순발력과 재치 있는 대응을 하고 있는 건지, 연기를 하며 나를 스스로 속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근데 내가 남편이 있었던가? 다 모르겠다.


오늘 퇴근길에도 나는 아마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목놓아 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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