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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r 04. 2024

지옥 같은 악몽 끝에 찾아온 천사

아무 날 아닌데 하루에 두 번 운 날



제일 먼저 다섯 살 여자 아이가 나왔다. 볼살은 통통했고 투명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칠 것 같았다. 눈이 커다랗고 이국적인 외모였다. 햇살에 부서지는 스테인글라스처럼 반짝이는 아이였다. 아이는 내 어깨에 매달리며 장난을 치고 계속 말을 걸었다. 어디서 봤더라.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내 주변엔 여자 꼬맹이가 없는데.


이 아이가 혹시 내 딸일까? 나 지금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조금 설렜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의 엄마가 나타났다. 아이 엄마는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 잡더니 나를 의식하듯 빤히 쳐다보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여자의 배는 쌍둥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잔뜩 부풀어있었다. 둘째를 임신했구나.


아이의 아빠가 내 남편이라고 했다. 내 등에 매달려서 머리카락으로 장난치던 다섯 살 꼬마도 남편에게 아빠라고 불렀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내가 아는 얼굴이다. 남편과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현지인 직장 동료였다. 링크드인으로 검색해서 얼굴을 봤었다.


시부모님이 느지막이 식당에 도착하셨다. 나를 보더니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휙 돌리며 외면하셨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아버님은 애들은 아무 잘못이 없지 않냐며 나를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나무랐다. 이제 너도 그만 포기하라고 했다. 이럴수록 너만 우스워지는 거라고. 아뇨 저 애가 다섯 살인데요. 다섯 살 어린애가 있는데 그걸 숨기고 저랑 결혼한 거잖아요. 그래놓고 저한테 1주일 만에 갑자기 이혼을 하잔다고요. 시부모님을 향해 입에서 칼을 뱉어내듯 날카롭게 대들었다. 엄마는 어른들에게 항상 공손하라고 가르쳤는데. 내가 입 밖으로 뱉은 칼들이 다시 고스란히 내 심장에 날아와 박힌다. 내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며 실시간으로 사라진다.




꿈이다. 그것도 아주 개 같은 꿈. 가위라도 눌렸나. 밤새 잠을 뒤척여서 하루종일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다. 아침약을 늘린 대신 저녁약은 조금 줄였다. 저녁약을 너무 섣불리 줄인 건지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 하루도 빠짐없이 꿈에 남편이 나온다. 그 사람이 안 나온 꿈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저 깊은 웅덩이에 빠져있다. 남편이 밀어 넣은 배신의 지옥에 여전히 붙잡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악몽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표정 관리도 사회생활인데 일부러 웃는 게 더 무섭게 보일 것 같았다. 힘들어서 친구와의 점심 약속을 파투 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친구라서 많이 보고 싶기도 했다. 이 친구는 며칠 전 일기에 쓴 호주에 살고 있다. 대학 졸업하고 호주에 정착한 친구는 호주 남자와 결혼해서 예쁜 딸을 키우고 있다. 친구와 나는 결이 비슷했다. 너무 가깝지도 매우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10년 넘게 두 나라를 오고 간 우정.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여행하면서 경험을 쌓고 사유를 넓혀가는 걸 좋아했다.


친구는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너무 예쁘더라. 너는 완전 연예인 같고 꽃 장식도 진짜 예뻤어. 이 친구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 나라에는 왠지 내 자리가 없어서 돌아왔다고. 일도 없이 혼자 집에만 있으려니 자존감이 낮아지는 기분이었다고. 사실 거기 생활이 안 맞아서 우울증에 걸렸다고만 말했다. 원인 제공자인 남편 이야기만 뺐을 뿐 다 맞는 말이다.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시놉시스만 두루뭉술하게 보여주는 기법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3년간 집에서 육아에만 전념했다던 친구는 내 말에 공감해 줬다.


나 그래서 한국에 취업해서 혼자 돌아왔어. 결혼 괜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나라가 안 맞았어. 결혼 이전에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겠더라. 요즘 우울증 약 먹고 있어.


너무 잘했다고, 외국 사는 거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친구는 갑자기 호주에서 사 온 선물이라며 꾸러미를 건넸다. 이럴 줄 알고 나도 친구 주려고 올리브영 탈탈 털어왔는데. 역시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다. 호주산 꿀부터 간식에 웬 그림책이 들어있었다. 내가 먼저 읽어봤는데 내용이 좋더라. 이따 자기 전에 가볍게 읽어봐. 그러면서 가방에서 주섬주섬 편지까지 꺼내 건네줬다.




연주야. 10년 전 강의실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있던 네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구석 자리에서도 눈에 띄어서 저 친구는 연영과 학생인가 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봤었거든. 그러다 면접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렇게 친구가 됐지. 나와 비슷한 부분이 참 많고 해맑던 네가 참 좋더라. (중략)


전화 속 너머 요즘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병원까지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덤덤한 듯 털어놓는 목소릴 들으니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던 너였는데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싶었어. 너의 모든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이 힘든 시기도 결국은 지나가고, 후에 돌아봤을 때 너의 인생에 가장 큰 배움과 성장을 줄 거라 믿어. 네 옆에서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마음 깊이 응원하고 있을게.




화장실에서 몰래 읽은 친구의 편지는 나를 엉엉 소리 내서 울게 만들었다. 회사 화장실인데도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한동안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저 칸에 누구 있어? 누구야? 왜 울어? 무슨 일이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어서 모두가 화장실을 떠날 때까지 한참을 더 울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그림책을 펼쳤다. 맨 앞장에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이 책이 너에게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길, Feb 2024'

다음 장을 넘겼는데 또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메모가 계속 붙어있다. 아까 낮에 이미 실컷 울었는데 퇴근하고 나를 또 한 번 울리는 친구. 지은이는 혹시 어젯밤 지옥 같은 꿈을 잊어버리라고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나는 오늘 작은 꿈이 생겼다. 이 일기를 책으로 펴내서 나를 응원해 주고 지켜주는 천사들에게 편지 써주기. 오늘은 제발 꿈같은 거 안 꾸고 푹 자면 좋겠다. 그 사람을 안 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챙기는 것 아닐까? 내가 행복해야 사랑하는 사람들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 나 자신부터 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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