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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r 06. 2024

아빠가 먼저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그 아빠에 그 딸은 우리 집 이야기


아빠가 며칠 전에 남편에게 먼저 연락을 해봤다고 말했다.


- 왜? 뭐 때문에? 아빠 뭐라 그랬는데?

- 그냥 걔도 많이 힘들 것 같아서 아무 얘기 안 할 테니 만나자고 했지. 길동이도 지금 얼마나 힘들겠어. 혼란스럽고.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니 더 불안하겠지.

- 그래서 오빠가 뭐래?

- 나보고 용건이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용건 같은 거 없다고. 그냥 사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같이 밥 먹자고 했지. 걔 얘기를 좀 들어주고 싶었어. 지금 걔 편이 없다고 느낄 거 아냐.

- 그랬더니?

- 따로 용건 있는 거 아니면 안 만나겠다고 하네. 이 상황이 다 정리되고 만나재.


웃기고 앉아있네. 이 상황이 다 정리되는 거면 지가 그렇게 원하는 이혼을 하는 건데, 이혼하고 남남된 사이에 지가 우리 아빠를 만나서 뭐 하겠다고.


이혼하자고 한 것도 남편이고, 나를 고소해 놓고 뒤에서 따로 우리 아빠에게 협의이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 것도 남편이다. 남편이 장인어른에게 자기가 한국에 들어가면 먼저 연락드리겠다고 한 게 작년 11월. 남편은 올 1월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낚시는 갔지만 아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나에게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제까짓 게 감히 우리 엄마 아빠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죽어도 용서가 안 된다. 아니야 그 사람은 환자잖아. 정상적인 판단이 안 돼서 그래. 정신이 아파서 그래. 계속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속은 더 썩어간다. 왜 나만 이해해야 돼? 그럼 정신이 그렇게 아픈 사람이 애초에 속이고 결혼은 왜 한 거야. 나는 아직도 시부모님께 최대한의 예의를 다 갖춘다. 우리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사돈에게 쓴소리를 한 적이 없다. 작년 추석에는 오히려 명절이라고 선물까지 보냈다. 아빠는 사위 마음을 달래주겠다며 두 번이나 먼저 연락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는 한 번 뱉은 절대 말 안 바꾼다고 득의양양하게 호언장담했던 그 남자. 그는 한 번도 자기가 한 말을 지킨 적이 없다. 매 순간 1초 단위로 프로그램이 리셋되는 고장 난 로봇처럼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책임감이 높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의 말에도 행동에도 그 어디에도 책임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한테 프러포즈할 때는 영원히 사랑한다고 눈물 뚝뚝 흘렸고, 결혼 준비를 할 때는 자기 인생엔 죽어도 이혼은 없다 그랬고, 결혼식 올리고 2주 만에 이혼하자고 그랬다. 제멋대로 사니깐 세상이 아주 우습고 만사가 편하겠지. 자기만 항상 억울하고 늘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그런 마음가짐이라서 그런 거겠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나는 나의 부모를 빼닮았다. 이 와중에도 사위라고 안쓰럽게 여기며 밥 한 끼 먹이고 싶어 하는 아빠를 보고 내가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착해서 겨우 괴물 같은 사람한테 등신처럼 배신당했나 보다.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만 갑자기 억울하고 야속한 마음이 한데 섞였다. 나는 그 새끼 때문에 실비 보험도 가입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는데. 하루종일 보험설계사들이랑 전화통 붙잡고 씨름했지만 겨우 들은 대답은 “죄송하지만 우울증 때문에 보험 가입이 어려우세요.”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집에 갔더니 아빠는 사위에게 마음을 써주고 있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다 터져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아빠에게 짜증을 냈다. 엄마는 더 편해서 많이 대들고 싸워봤지만 아빠한테는 한 번도 대든 적이 없었다. 아빠랑은 항상 사이가 좋았다.


아빠. 아빠 딸은 안 보여? 나 그 새끼 때문에 보험 가입도 못한대. 앞으로 10년 동안 실비도 없이 살아야 돼. 난 진짜 될 수만 있으면 다 죽여버리고 싶어. 아빠가 그렇게 오빠나 시댁 배려만 하는 거 싫어. 나는! 나는 죽고 싶다고. 지금 내가, 아빠 딸이 더 지옥이라고!


사실 아빠는 잘못한 게 없다. 남편이 잘못이지. 그런 남자를 남편감이라고 아빠에게 보여준 내 잘못이지. 아빠에게 이렇게 아픈 모습 보여주는 내 잘못이지. 내가 너무 불효자식이지. 아빠 화풀이해서 미안해. 아빠가 떠난 현관에 주저앉아 또 한참을 울었다. 밑도 끝도 없이 망가져버린 내가 너무 싫어서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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