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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r 05. 2024

죄송하지만 남편분 때문에 보험 가입이 어렵습니다.

지는 보험 가입 다 해놓고 아주 좋겠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남편이 보험 때문에 자기 엄마에게 발작 버튼이 눌려서 난리 친 적이 있다. 시어머니께서는 남편이 어릴 때부터 남편 앞으로 보험을 붓고 계셨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아마 남편이 20대 초반부터 가입한 보험도 있고, 10년 넘게 납입해서 금액도 꽤 됐던 걸로 안다. 정확히 무슨 보험인지 모르지만 아마 상해 질병 보장성 보험도 있고, 저축성 연금 보험처럼 미래에 남편이 온전히 수혜를 받는 그런 상품이었다. 솔직히 감사한 일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결혼하고 같이 늙어가면서 남편이 아프기라도 하거나 혹은 만기가 돼서 목돈을 돌려받을 때가 되면 언젠가 어머니께 감사할 일이었다. 자식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은 다 똑같아서 그게 내 보험이 아닌데도 나는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동안 관심도 없다가 우연히 보험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고, 시어머니를 향해 원초적인 분노를 쏟아내며 공격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왜 화를 내는 거지?




자칭 원리 원칙주의자인 남편 입장에선 어머니의 보험 가입이 자기 논리에 위배됐다. 미성년자도 아닌데 자기에게 허락받지 않고 자기 명의로 보험을 가입한 것은 명백한 명의 도용이라고 날뛰었다. 법을 들먹이며 보험설계사와 보험사를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엄마는 바보같이 보험설계사한테 사기당한 거라고 화를 냈다. 어머니는 중간에서 난처해하셨다. 남편은 그럴수록 어머니를 더 몰아세우며 난리 쳤다. 연로하신 어머니 앞에서 소리쳤다. 애석하게도 어쩌다 보니 나도 있는 자리였다. 기분 좋게 시댁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보험 얘기가 또 나왔고 남편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남편은 그 상황이 불편할 내 입장을 배려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예비 며느리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길길이 날뛰는 자기 아들을 보며 느꼈을 어머니의 당혹감이나 부끄러움은 남편 몫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답답한 마음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나는 그 집 딸도 아닌데 어머니가 무지 안쓰러웠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남편은 끊임없이 자기 논리만 주장하며 계속 소리를 높였다. 결국 어머니는 예비 며느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어머니가 남편 잘못되길 바라며 보험 든 것도 아니었고, 무슨 사망 보험금을 잔뜩 들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환급되는 저축성 보험 같은 거였다. 남편은 자기 엄마의 눈물을 보고도 화를 그칠 줄 몰랐다. 자식 생각하는 엄마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내가 나서서 겨우 상황이 진정됐다. 나는 남편이 그저 키워봤자 필요 없는 아들새끼인 줄만 알았다. 시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남편에게 따로 어머니의 입장과 심정을 설명해 주니 남편은 그제야 이해했다. 사실 정말 이해했는지 이해한 척하고 넘어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때 그는 아마도 내 말을 듣는 척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뜻대로 그 보험들을 손해 보고 다 해지했다. 자기 이름이 도용됐다는 것에만 꽂혀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도 화가 단단히 나셨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내 남자친구지만 성격 참 이기적이다. 부모 마음을 저리도 몰라주다니. 앞으로 이 집안 효도는 나 혼자 다 하겠네 생각했다. 어쩜 저리 철이 없을까. 남자들은 평생 철이 안 든다던데 그게 진짜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따로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 내 동생이었다면 뒤통수를 크게 후려치고 대신 화냈겠지만 아직 결혼 전이었다. 그건 남편 부모님의 돈, 남편 명의의 보험, 남편과 자기 엄마의 싸움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남의 집 일에 끼어들기가 애매했다. 나도 결혼 준비하면서 엄마랑 크고 작은 걸로 싸웠고, 내가 난리 칠 때마다 남편은 우리 모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남편에게 따로 어머니 입장을 설명해 주는 게 최선이었다.




얼마 뒤, 남편은 내게 말없이 누구를 좀 만나고 온다고 했다. 누구 만나는데? 몰라도 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꼬치꼬치 캐묻고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편은 웬 서류를 들고 돌아왔다. 몰래 슬쩍 보니 보험증권이었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말했다. 앞으로 부부가 되면 경제 공동체, 건강 공동체라서 보험 같은 것도 서로 같이 알아보면 좋을 텐데.


- 오빠, 이 보험 뭐야?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나도 보험 없어서 들어야 되는데. 나한테 말해주면 같이 들었어도 좋을 텐데.

- 아 몰라. 너까지 보험 얘기로 짜증 나게 하지 마. 엄마 때문에 괜히 쓸데없는 보험 공부하느라 보험 하나 들어야 됐어.

-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누구한테 든 건데?

- 있어. 엄마가 가입한 보험 따지려면 보험 재설계하는 사람한테 알아봐야 됐고, 그거 고마워서 예의상 하나 가입해 준 거야. 스트레스받으니깐 이제 보험 얘기 꺼내지도 마.




보름 전부터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 삐이이이- 하는 이명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린다. 이명만 있는 게 아니라 고막이 갑자기 터질 것처럼 통증이 심하다. 머리도 어지럽다. 살면서 중이염에 걸려본 적이 없어 인터넷에 증상을 검색해 보니 돌발성 난청일 수도 있고 메니에르병일 수도 있다는 말에 불안해졌다. 이마저도 다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다 남편 때문이겠지. 귀 통증이 매일 심해져서 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비인후과 가기 전에 먼저 실비 보험을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1세대 실비 보험이 만료되어서 새로 가입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내친김에 아직 암보험도 없으니 하나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보험설계사 몇 명에게 상담을 받았다. 다들 나는 아직 어린이 보험 가입이 가능한 나이라고, 가족력이나 건강에 문제없으니 기본으로 구성해 주겠다고 말했다. 혹시 장기 복용하고 있는 약은 없으시죠? 아 저 남편 때문에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데요. 정신과 다니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작년 여름부터요. 그러시군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로 보험 가입을 거부당했다. 30일 이상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고, 3개월 이내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기 때문에 건강체로 가입이 불가능하단다. 유병자로 가입을 해야 되는데 보험금도 비싸고 혜택도 좋지 않으니 차라리 우울증 치료가 다 끝난 시점으로부터 5년 뒤에 가입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이 우울증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르는데. 병원이나 상담센터나 3년 정도를 말씀하셨다. 그럼 3년 뒤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가입할 수 있다. 그때면 이미 40대 중반. 나는 그때까지 아무 보험도 없이 지내야 한다.


분노가 치솟았다. 남편을 정말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정신과 다닐 사람은 따로 있는데 피해자인 내가 병원 다니는 것도 억울해 죽겠다. 근데 이제 보험 가입조차 내 마음대로 못한다니. 보험사 입장도 당연히 이해된다. 보험사는 절대 손해 보기 싫으니 우울증이든 뭐든 정신질환자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상해나 사망을 입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 장기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뇌/심장질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이혼녀 딱지를 두 번 붙이는 기분이었다. 보험사 입장에서 리스크 있는 상품이 되어버렸다. 화병 나서 이러다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리면 그때는 어떻게 책임질래? 대답해 봐. 야! 말 좀 해보라고.




이혼만 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앞으로 이혼하고 나서도 혼자 뒷수습해야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아직 진짜 이혼은 시작도 못했다는 것. 남편의 풀배터리 검사가 이 이혼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정신이 아픈 사람과 이혼하는 건 끔찍하게 답이 없다. 먼저 이혼하자고 화를 내던 그 사람은 이혼 말만 남기고 이 상황에서 쏙 빠졌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돌변한 남편의 모습을 마주하고 처음에는 충격이 너무 컸다. 그때는 그래 니 멋대로 해라, 이렇게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이혼을 떠먹여 줘야 될 판이다. 피해자가 먼저 나서서 가해자 찾아다니고 합의하자며 굽실대는 꼴이 지금 내 처지다. 그래서 내 울화가 다 귀로 갔나 보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삐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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