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연주 Mar 07. 2024

저는 신혼여행 혼자 갈 거예요.

혼자서 가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용~



연주님은 신혼여행 어디로 다녀오셨어요? 연주님 여행도 많이 가보셨잖아요. 저 신혼여행 어디로 가면 좋을지 추천해 주세요. 제 여자친구는 A를 가고 싶어 하는데 저는 B나 C도 가고 싶거든요. 어디가 나을까요?


순간 뭐라고 둘러댈지 막막해서 일단 '음' 스킬을 썼다. "음...." 잠시 고민해 보는 척하기. 팀에 결혼 생각 중인 동료분이 신혼여행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신혼여행 가본 적도 없는데 졸지에 신혼여행지 추천을 해주고 있었다.


아 저는 태국 코사무이 다녀왔어요.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여름휴가로 코사무이에 갔다. 결혼 전이었으니 사실 신혼여행은 아니었다. 그냥 여름휴가였지만 남편의 생일을 기념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는 서로의 생일마다 꼭 여행 가기로 약속했었다. 그전에 있던 내 생일에는 코로나 때문에 해외 나가기가 어려웠던 시기라서 기장 아난티 코브에 갔었다. 남편의 생일을 앞두고 해외여행이 슬슬 풀렸으니 극성수기였음에도 일부러 돈을 더 내고서라도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맨날 캠핑 다니면 텐트에서 꾀죄죄하게 야영만 하다가 모처럼 해외여행 가는 거니깐 우리도 좋은 데 가보자고, 앞으로 결혼하면 이렇게 좋은 데 쉽게 가기 힘들다고 큰맘 먹고 비싼 숙소를 잡았다. 하룻밤에 400만 원이나 하는 포시즌 리조트 풀빌라였다. 어떻게든 싸게 가보려고 여행사 허니문 패키지로 다녀왔다. 원래 결혼 전에는 허니문 패키지로 못 가는 게 맞는데, 코로나 여파로 여행사들이 많이 힘들었는지 특별히 제공해 준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는 코사무이에서 제일 비싼 리조트를 골랐으니 여행사에서도 굳이 손해 볼 건 없었겠지.




살면서 그렇게 좋은 숙소는 처음 가봤다. 물개 남편은 숙소에 딸린 개인 풀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수영장으로 풍덩 들어갔고, 밤엔 쏟아지는 별을 보며 알몸으로 유영을 즐기기도 했다. 낮에는 바다에 나가서 스노클링을 했고, 허니문 패키지에 포함된 프라이빗 요트를 타고 타이만 바다 한복판에서 다이빙도 했다. 또 셀프 웨딩 스냅도 찍겠다고 한국에서부터 미리 챙겨간 커플룩까지 입고 삼각대 설치해서 야무지게 사진도 찍었다. 게다가 남편 생일을 서프라이즈 해주겠다고 한국에서 파티 용품에 선물 교환권까지 만들어갔다. 생일 선물로 골프 클럽을 샀는데 그 긴 클럽을 몰래 티 안 나게 태국으로 가져갈 순 없었다.


남편의 생일 당일, 그가 개인 풀에서 열심히 수영을 하는 동안 나는 미리 컨시어지에 전화를 걸어서 서프라이즈 파티를 부탁했다. 잠시 후 남편은 수영복 차림에 물 뚝뚝 흘리는 채로 갑자기 생일 축하를 받았다. 친절했던 리조트 직원들은 6-7명이 떼거지로 와서 밴드처럼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우리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사진 찍을 때는 물안경 좀 제발 벗자고 억지로 그의 수경을 벗겨보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 나는 성공적으로 남편을 감동시킨 것이 뿌듯했다. 남편과 수많은 여행을 함께 다녔지만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순간들은 모두 진실됐다.


웬만한 전 세계를 다 가본 나는 휴양지의 끝판왕이라는 몰디브도 가봤지만 숙소만 놓고 보면 코사무이가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포시즌 이름값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 광화문에 있는 포시즌 호텔은 원래 호텔 부지가 아닌 곳에 억지로 지어놓은 호텔이라서 그런지 좁고 답답했다. 삭막한 시티뷰, 게다가 주말엔 맨날 집회 소리 때문에 항상 경험이 안 좋았는데. 진짜 포시즌은 이런 거구나. 포시즌에 제대로 반한 우리는 진짜 신혼여행도 포시즌으로 가기로 했다. 오빠 우리 어디 포시즌으로 가지? 우리는 코사무이에 다녀온 뒤로 포시즌에 푹 빠져서 신혼여행 계획을 짤 때마다 포시즌 홈페이지부터 들어갔다. 각 나라별 포시즌 리조트를 하나씩 비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혼여행지를 고를 때 가고 싶은 나라, 그리고 그곳의 계절이나 액티비티 취향으로 고른다. 우리처럼 호텔 브랜드를 먼저 골라놓고 신혼여행지를 추려낸 사람들도 있을까? 44개국 129개의 포시즌 호텔 중에 먼저 도시를 빼고 우리 취향인 자연친화적인 곳으로 추려내니 남은 곳은 탄자니아였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 한복판에 있는 포시즌 리조트라니. 생각만 해도 이국적이고 설레는 장면이었다.


정말이지 신혼여행을 너무 기다렸다. 평생 결혼 안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신혼여행만큼은 왠지 환상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 준비를 하며 유일하게 신혼여행을 몹시 기대했다. 결혼식은 그저 엄마 아빠를 위한 행사고, 드레스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어차피 신부 화장하면 안 예쁜 사람 없으니 공주 놀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제일 나답게 신혼여행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신혼여행도 못 가본 주제에 남의 신혼여행에 참견하는 내 꼴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회사에서 나오는 안식 휴가에는 나 혼자 탄자니아 포시즌 리조트에 가야지. 세렝게티 초원 위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야생 동물들을 구경하며 풀빌라에서 수영해야지. 밤에는 별을 하나씩 헤며 지난날의 눈물을 뒤로해야지. 우주의 한 톨 먼지 같은 나도 저 별까지 도달하려면 지금 내가 겪는 슬픔은 먼지만도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아픔을 다 이겨낸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겨줘야지.


신혼인데 신혼여행 안 가봤고요, 결혼했는데 결혼생활 안 해봤습니다. 제 신혼여행은 혼자 갈 거니깐 돈이나 두 배로 더 모으려고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꼭.



이전 23화 아빠가 먼저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