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없이 26일째

음식 쓰레기와 전기료 줄고 이야기 늘어

by 글 짓는 은용이


“아, 우리 달걀이 없잖아!”


막 끓기 시작한 라면 물을 바라보던 짝이 번쩍 떠오른 듯 말했다. 냉장고가 없어 미리 사 둔 달걀이 없었던 것. 지난달 18일 밤 집 냉장고가 17년 만에 멈춘 뒤로 한집 사는 짝과 아들과 나는 달걀을 사지 않았다. 어디 달걀뿐이겠는가. 먹을거리를 차갑게 넣어 둘 데가 없으니 미리 사 둘 게 많지 않았다. 특히 채소 등속. 겨울인데도 하루이틀이면 먹지 못할 냄새를 풀풀 날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닥뜨린 먹을거리가 ‘쉰’ 냄새. 722리터짜리 덩치━ 냉장고 ━가 품었던 이것저것이 엇비슷한 냄새와 함께 잇따라 버려졌다. “냉장고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하며 열흘쯤 숨 고르던 짝과 아들과 나는 지난달 27일 낮 ‘달걀을 풀어 넣지 못한 라면’이 못내 아쉬웠다.


새해 1월 12일. 냉장고 없는 삶 26일째. 요구르트, 치즈, 버터, 우유, 탄산음료, 아이스크림 들이 사라졌다. 채소와 과일도 사라졌고. 곶감과 콩과 당근과 미숫가루가 창가에 자리 잡았다. 귤과 바나나처럼 냉장고 밖에 두고 먹는 게 남았고.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던 게 사라지니 음식 쓰레기가 줄었다. 일주일에 두세 개씩 내보내던 3리터짜리 음식 쓰레기 종량 봉투가 하나로 넉넉해진 것. 쓰레기가 ‘3리터에서 6리터쯤’ 줄었으니 냉장고가 있을 때보다 덜 먹긴 한 것으로 보였다. 덜 먹었으니 설거지도 크게 줄었고.


전기료도 줄었다. 지난 5일 통장에서 빠져나간 2025년 12월 치 요금이 11월보다 2만 원 적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전기를 먹던 냉장고가 지난달 18일부터 멈췄으니 요금이 줄 만도 했을 터. 새해 1월 치 전기료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짚인다.

▴지난 2017년 집 냉장고 냉동실 문짝에 붙어 있던 칠판. 냉동실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적어 두려고 짝이 마련했다. 2016년과 2017년 사이 해넘이 때 아들이 가족 나이를 적어 넣었다.


가족 사이 이야기는 늘었다. 냉장고를 둘러싼 이야깃거리가 늘었으니까. 냉장고가 없어서 라면에 달걀을 풀지 못할 걸 깨닫고 마주 보며 웃은 이야기. 냉장고가 없어서 어묵 선물을 받지 못하고 따듯한 마음만 받기로 한 이야기. 냉장고 다음엔 세탁기가 설 것 같다며 또다시 마주 보며 웃은 이야기. 아무래도 냉장고를 사긴 사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 산다면 크기를 줄이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


냉동실 문짝에 붙여 뒀던 칠판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이야기. 냉장실 쪽 문짝에 붙여 뒀던 자석 몇 개는 남아 있어 좋은 이야기.


▴집 냉장고 냉장실 문짝에 붙어 있던 자석과 사진. 냉장고 앞에 선 가족 누군가는 냉장실 문짝 자석과 사진을 바라보며 말하곤 했다. 그땐 그랬고 이건 어디였고 저건 이모가 준 거라고. ‘지난날 더듬이’요 이야깃거리였다.


“달걀 좀 사다 줘. 한 판은 안 되겠고 적게 든 걸로.”


달걀프라이를 좋아하는 짝. 내가 사 온 달걀 열 개 가운데 넷을 부쳤다. 동네 마트에서 가장 적게 살 수 있는 달걀 한 꾸러미는 열 개짜리.


여섯 개가 남았을 터. 새해. 짝과 아들과 나는 아직 라면을 끓일 생각이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도와 홍보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