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부부의 귀촌 일기(1) - 내가 만난 두 번의 계기
우리 부부는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main stream에 속해 있었다.
좋은 대학, 번듯한 대기업, 서울 시내 거주지. 일 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과 주말에는 캠핑과 골프, 영화, 와인...
'안정적인 삶'이라고 일반적으로 규정한 테두리 안에서 아무 문제없는 듯이 살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삶의 의문이 올라올 때면 대중이 따르는 삶이 정답이겠거니 생각하며
중심에서 나를 흔드는 질문들을 그저 스트레스로 인한 어리광 정도로만 치부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계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첫 번째 계기
4살, 2살 아이들을 키우던 워킹맘 시절, 두 아이 다 심한 열감기로 동시에 아픈 적이 있었다.
출근하려는 내 바지끄덩이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집을 나서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범벅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내내 '이렇게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둘째 아이는 심한 중이염으로 양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대학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증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늘어가는 아이의 짜증과 투정이 나를 힘들게 하곤 했다.
상대적으로 어린 동생 때문에 첫째 아이는 혼자 놀기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원래 그 나이 때가 힘든 거라고, 조금만 견디면 괜찮아진다는 선배맘들의 조언을 새기며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는데 그날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회사에 가자마자 사표를 내고(육아휴직을 쓸 수도 있었지만 망가진 삶을 되돌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나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내 주변의 워킹맘들은 잘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미 그 과정을 거친 여성 리더들도 많은데... 나는 왜 이 모양인지... 왜 이리 마음이 연약한지...
사실 워킹맘으로 사는 내내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져 있었다.
인정욕이 강한 나였기에 일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좋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모든 것에서 잘하고 싶었다. 둘째 출산 2개월 만에 회사에 출근한지라 몸이 뜻대로 받쳐주지 않았고, 몸 상태가 그러하니 아이들을 대할 때도 너그럽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둘째 아이의 짜증은 나의 짜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고, 아이의 짜증을 받아줄 수 있는 한 톨의 여유도 내 안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슬픈 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이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조카들의 보모 역할을 도맡아 하곤 했는데, 정작 내 아이는 이쁜 줄 모르고 키웠다. 나 살기 바빠서... ㅠㅠ (지나고 보니 워킹맘이라서 힘든 게 아니라, 내 욕심으로 인해 내가 자초한 결과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이 아픈 계기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똑같은 패턴으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벗어났다고 말하긴 뭐 하긴 하다 ;;)
안정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 없었기에 두려웠지만 막상 그 세계에 들어가 보니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도 떨고 반찬도 나누고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은 알고 보면 아이들에게 엄마의 존재감만으로도 엄청난 안정감을 주는 시간이었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테두리 밖에서 보니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내 일은 허울뿐인 타이틀이었고, 뭘 위해 그렇게 내달렸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오히려 나오고 나니 작은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일에서의 성공, 승진, 그리고 내 커리어를 위해 회사에서는 두터운 가면들을 겹겹이 썼기에 마음은 항상 억눌려 있는 거 같았고 사람들과도 깊이 있는 대화 없이 사무적인 대화만 오갔었다.
회사를 벗어나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는 그 시간들은 내 영혼을 느낄 수 있었고, 소소한 감정들을 찬찬히 느끼고 소중히 다룰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계기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