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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Oct 12. 2024

설의 이야기 (2)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4화

유와 설이 토굴에 자리를 잡은 때는 산에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원래 산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산에 들어온 건 유와 설을 도운 노부부였다. 그들은 사계가 뚜렷하던 예전부터 매일 이 산에 올라 약초와 버섯을 캐며 살았다. 그러기에 눈을 감고도 산세가 훤했다. 가장 안정적으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에 거처를 마련했고, 풍족하진 않아도 배곯을 일은 없이 산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모두가 노부부 같지는 않았다. 가족 단위로 피신 온 사람들은 한 달 이내에 절반 이상 죽었다. 낮에 열사병으로 죽거나, 밤에 발을 헛디뎌 죽거나, 무시로 아무것도 못 먹어 죽거나 무언가를 잘못 먹어 죽었다. 그래도 산에서 한 달 정도를 버틴 이들은 웬만해서는 쉽게 죽지 않았다. 한낮을 피할 나름의 장소와 음식을 구하는 나름의 방법을 파악한 덕이었다.


고등학생 때 가출해서 도시로 나가 살던 노부부의 아들은 부모를 떠난 지 거의 30년 만에 산에서 부모와 재회했다. 데리고 산 날보다 연락이 끊긴 채 산 날이 배는 더 길었지만, 부모와 아들은 묵묵한 응시 속에서 서로를 알아봤다. 노부부는 왼쪽 이마에서 눈을 지나 뺨까지 길게 그어진 흉터를 가지고 나타난 아들에게 오만가지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저 말없이 아들을 받아들였다. 나이 든 아들은 늙은 부모를 따라 산을 익히고 산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소규모로 각자도생 하며 살던 사람들은 점차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물과 음식을 구하기 그나마 수월한 장소는 제한적이었고, 거기서 밤에 마주친 이들은 풀을 베거나 동물의 사체를 자르던 칼을 서로에게 겨누었다. 이 구역은 내 구역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먼저 왔으니 다른 곳으로 꺼져라, 당신이나 꺼져라. 아주 일차원적이고 유치하지만 생존과 직결되는 싸움이 몇 차례 벌어졌다. 노인이 유와 설을 처음 발견했을 때, 경계심을 가지고 차갑게 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원시 시대와 별 다를 것 없는, 아니 그보다 훨씬 열악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갈등을 피하고 서로 힘을 합쳐 먹을 것을 찾아 공평히 나누자는 주장을 하는 긴 머리 남자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형성됐다. 그리고 노부부의 아들인 흉터난 남자를 중심으로 또 다른 무리가 형성됐다. 흉터 밑으로 모인 사람들이 소수였다. 씨름 선수처럼 근육이 다부지고 덩치가 큰 남자와 그의 가족, 어깨 아래로 오른팔이 없는 외팔이 남자와 그의 남동생, 얼굴에 하얀 반점이 얼룩덜룩한 백반증 남자와 그의 가족, 총 열세 명이 흉터의 무리였다. 사십여 명 되는 남은 사람들은 모두 긴 머리 남자를 따랐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은 무리를 형성하기 전에 죽고 말았는데, 하나는 흉터와 시비가 붙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덩치와 싸움이 나서였다.


긴 머리 남자는 성인 남자들을 셋 혹은 넷씩 짝지어 다니도록 하며 흉터 무리를 견제했다. 가능하면 흉터 무리의 동선을 피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했고, 불가피하게 마주치더라도 싸움을 피하고자 했고, 어쩔 수 없이 대치하게 된다면 팀워크를 발휘해 상대를 제압하도록 지시했다. 긴 머리 역시 노부부처럼 산을 꽤 아는 이였기에 그의 전략은 성공적인 듯했다. 연대를 이룬 사람들은 각자도생 할 때보다 활력을 되찾았고, 음식을 구하고 물을 긷고 요리를 하고 거처를 정비하는 작업을 분담해서 더 효과적이고 요령 있게 일을 했다. 이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처절하게 터득한 생존 전략들을 공유했다. 먹어도 되는 식물과 안 되는 식물을 분별하고, 다치거나 아플 때 서로를 치료하고, 보유한 연장을 서로 빌려주며 사용하고, 산의 재료로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나눴다. 아이들은 친구가 생기고, 어른들도 웃음과 농담이 늘었다. 흉터 무리의 위협은 이들을 더욱 단단히 뭉치게 만들었다.


흉터 쪽 사람들도 무리를 형성하고 전보다 수월하게 지냈다.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 산의 다른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기 때문에, 물과 음식을 두고 다툴 일이 없었다. 그들은 가끔 멀리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이딴 시기에 웃고 있는 거지? 흉터는 덩치와 외팔이를 시켜 염탐했다. 둘은 긴 머리 남자 무리에게서 별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꾀죄죄하고 마르고 궁색했다. 어느 날은 계곡에서 물을 뜨던 여자들이 정답게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나타난 덩치와 외팔이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근방에 있던 남자 넷이 달려왔다. 이중에는 긴 머리 남자도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그건 내가 할 말이오. 다짜고짜 사람을 보고 왜 소리부터 치쇼?

-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물을 뜨러 오신 거면 비켜드리겠습니다.


외팔이와 대화하는 긴 머리의 남자 양옆으로 결연한 표정의 남자들이 묵묵히 섰고, 여자들은 그들 뒤로 몸을 숨겼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 에이씨, 이거 뭐 기분 나빠서 원.


외팔이가 발아래 주먹만 한 돌멩이를 거칠게 찼다. 돌은 긴 머리 남자의 정강이에 적중했다. 긴 머리 옆에 선 남자가 낫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팔을 들어 올렸다. 긴 머리가 그의 팔을 부드럽게 눌러 내렸다.


- 저희도 놀라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 부탁합니다. 다음에는 반갑게 인사하며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외팔이가 힐끗 덩치의 눈치를 봤다. 덩치도 상대 남자들을 보며 각을 재고 있었다. 둘만 되어도 어떻게 해보겠지만, 넷은 많다. 외팔이는 말만 하지 정작 몸싸움에서는 일인분의 몫도 못할 것이다. 덩치는 침을 퉤 뱉고,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외팔이도, 에이 씨발, 욕을 던지며 덩치를 따라갔다.


이 무렵이 바로 유와 설이 토굴 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유와 설의 토굴은 노부부의 동굴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긴 머리 무리보다는 흉터 무리의 영역에 가까웠다. 흉터는 유가 군인 출신이라는 것과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설이 만삭이라는 것과 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유가 서슴없이 총을 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흉터는 유를 자기 무리로 넣고자 유를 찾아갔다.


- 여기 자리 잡았습니까?

- 네. 어르신들은 잘 계십니까?

- 노인네들이야 늘 똑같은 거고……. 아기는 언제 나옵니까?

- 몇 주 남았습니다.

- 이런 데서 애 낳고 기르기가 쉽지 않을 텐데.

- 잘해봐야죠.

-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면 더 편할 거요. 우리랑 합류해서 먹을 것도 찾고, 방해되는 거 있으면 제거하고 그럽시다.


유는 흉터의 속셈이 보였다. 흉터가 자기와 시비가 붙은 사람을 죽이고 온 날, 동굴에서 노인과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고, 간혹 설을 찾아오는 할머니를 통해 산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는 어느 무리에 속하기보다는, 스스로 산을 익히고 설과 아기를 지켜내고 싶었다. 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것도 바라는 바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특히 상대가 흉터라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는 흉터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덩치와 외팔이가 돌아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흉터는 심기가 불편했다. 따지고 보면 흉터 입장에서는, 긴 머리 무리가 거리를 두어 이동하고 유가 제 갈 길을 가는 게 나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흉터는 자기를 빼고 돌아가는, 그것도 꽤나 잘 돌아가는 것 같은 인간들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게 거슬렸다. 가출해서 도시로 나가 살던 때부터 생각보다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흉터였다. 그는 다음 날 밤, 덩치와 외팔이의 동생, 백반증을 데리고 긴 머리 무리의 구역으로 향했다. 셋이서 한 팀으로 작은 동물을 사냥하려던 남자들을 마주치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낫을 휘둘렀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사망자는 셋이었다. 그날 그들은 계곡가를 뒤져 찾아낸 여자들을 쳐서 기절시키고 그중 가장 젊은 여자를 메고 왔다. 외팔이의 거처에서 여자는 다섯 남자에게 번갈아 유린당했고, 숨진 채로 긴 머리 무리 구역 부근에 버려졌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사흘 만에 산은 정리됐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흉터 무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첫날, 이성을 잃고 찾아온 숨진 여자의 남편과 그와 함께 온 남자 셋을 죽였다. 둘째 날, 통곡 속에서 비상 대책 회의를 하는 긴 머리 무리는 전날과 그 전날 죽은 남자 일곱과 여자 하나로 이미 패배한 분위기였다. 셋째 날, 대화를 위해 찾아온 긴 머리와 나름 그를 경호하려고 함께 온 남자 넷을 더 죽였다. 이때는 덩치와 백반증의 부상이 있었지만, 그래도 긴 머리의 죽음으로 이미 승부는 끝났다. 산은 흉터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유와 설은 두려움 속에서 밤을 찢는 며칠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유는 설에게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쳤다. 설이 남편이 손에 쥐어준 총을 들었을 때, 다리 사이로 왈칵 물이 쏟아져 흘렀다. 극심한 배의 통증이 이어졌다. 유는 설이 미리 철저하게 가르쳐준 대로, 그러나 덜덜 떨리는 서툰 손으로 아이를 받았다. 설은 이르게 태어난 작고 쭈글쭈글한 아이를 품에 안았고, 유는 그런 설을 안았다. 아기의 울음이 산의 울음소리에 섞여 들었다.


산속에서도, 산 밖에서도 숱한 죽음이 있던 시기에 태어난 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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