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은 일출 직전 식사를 마쳤다. 해를 피해 서둘러 동굴에 들어갔다. 윤과 선우가 어제 잠을 잤던 입구 쪽에 멈춰 서자, 설이 그들을 돌아봤다.
- 이리로 더 들어오세요. 큰 차이는 아니지만 더 선선해요.
선우가 앞장서 설을 따르고, 윤은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설의 잠자리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선우가 이불로 쓰는 스카프를 펼쳤다. 윤의 얇은 천조각도 선우가 대신 깔았다. 자리에 앉은 윤 곁으로 설이 다가왔다.
- 상처 한 번 볼게요. 감염됐을 것 같은데, 소독해야 할 거예요.
설은 능숙하게 상처를 살폈다. 소독약을 바르는 동안 윤이 쓰라림에 몸을 움찔했다. 더 나빠지려는 아픔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니, 따끔한 통증이 오히려 반갑고 고마웠다. 한 손에는 손전등을, 다른 손에는 겨울이를 안고 있는 선우와 새 붕대를 감고 항생제를 건네는 설이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어떤 처음을 공유해 온 가족처럼 느껴졌다.
- 어떻게 이런 약들을 다 가지고 계세요?
- 원래 간호사였어요.
- 아... 그러셨구나. 치료 고맙습니다.
- 며칠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해요. 또 열이 나면 말씀하세요.
설은 제 자리에서 윤을 등지고 앉아 아기에게 수유를 했다. 낡고 해진 설의 윗옷이 말려 올라가 앙상한 등과 옆구리가 일부 드러났다. 흐릿한 불빛과 꾀죄죄한 몰골에도 설의 흰 피부와 그 위에 찍힌 붉고 푸른 멍자국이 보였다. 윤은 조용히 돌아 누웠다. 힘껏 젖을 빠는 소리, 아기를 한참 도닥이는 소리, 선우와 겨울이의 잠든 호흡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어쩌다가 아기랑 단 둘이 산에 머무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원래 남편이랑 같이 올라왔었어요.
- 아…….
아이들이 깨지 않게 나지막이 흘러나온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아이 아빠는 지금 어디 있는지 윤은 묻지 않았다. 이미 답을 들은 듯했다. 대신 윤은 다른 걸 물었다.
- 옆산이 먹고살기 더 좋다고 하셨는데, 왜 그리로 안 가시고 여기 계시나요?
- 저한테는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거든요. 오히려 여기가 좀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질문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윤은 어둠 속에서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서로 잠이 든 건가 싶을 때쯤 긴 한숨과 함께 설이 혼잣말하듯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무렵, 설은 대학병원 7년 차 간호사였다. 늘 바쁘고 정신없는 병원이지만, 매해 그 정도가 심해졌다. 눈에 띄게 증가하는 온열질환 환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이나 아이들이 많았지만, 점차 나이와 무관하게 사람들이 실려왔다. 더 이상 환자를 수용할 수 없을 때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한낮의 야외활동이 금지되고, 대부분의 일은 밤에 수행됐다. 온열질환으로는 병원을 찾지 말라고도 권고했다. 그러나 더위에 쓰러진 가족과 지인들을 업고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렸다. 업힌 사람뿐 아니라 업고 온 사람도 병원 복도에서 탈진해 드러누웠고, 그들을 옮기고 치료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옥이란 이런 걸까, 설은 병원의 아비규환 속에서 절망했다.
24시간 돌아가는 에어컨과 밤이면 한꺼번에 켜지는 조명들로 얼마 못 가 전력이 고갈됐다. 국경은 폐쇄되고 계엄령이 선포됐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 둘 지하로 기어들었다. 내려갈 힘이 없는 사람들은 집 안에서 죽었다. 설이 근무하던 대학병원도 환자를 포기하고, 의료인력들을 해제시켰다. 정부에서는 군대와 함께 봉사할 최소한의 의사, 간호사를 모집했다. 혼자 살고 있던 설은 여기 지원했다. 장갑차가 와서 설을 태워갔고, 설은 군인들로 가득 찬 지하벙커의 한쪽 구석 자리를 배정받았다. 거듭된 혼란 속에서 천천히 나름의 체계가 잡혀갔다. 밤 11시, 한 조로 묶인 군인 열다섯 명과 간호사 한 명이 차를 타고 할당된 대형 건물로 향한다. 군인들은 해당 건물에 수용된 인원을 파악하고, 식량을 배급한다. 음식을 더 달라거나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난폭한 사람들을 제지하는 인력이 가장 많고, 며칠에 한 번씩은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를 치운다. 설은 지하 사람들의 건강이나 상태를 돌보지 않았다. 설의 임무는 같은 차에 탄 군인들이 입은 상처나 질병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설이 속한 조에 유가 있었다. 유는 그 조의 리더였다. 다른 조의 관할구역에서는 하루에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십수 명까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인들이 배급될 음식의 일부를 빼돌려서, 안 그래도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양보다 더 적은 음식을 받은 사람들이 항의를 했고, 비록 비폭력 항의라 할지라도 군인들은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그렇게 한 명이 죽으면 남은 이에게 돌아갈 몫은 더 커지기에, 위에서도 아래서도 이런 소동을 묵인했다. 유는 부하들을 철저히 관리해 식량 배급을 원칙대로 수행했다. 유 밑의 군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유의 구역에서 음식을 받는 사람들도 유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유는 때때로 자기 몫의 음식 일부를 타인에게 양보하기도 했지만, 유는 점점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설만이 유를 안타깝게 여겼고, 유의 상태를 살피며 둘은 가까워졌다.
몇 달 후 설은 배 안에서 뭔가 톡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날이 비정상적으로 무더워진 오륙 년 전부터 과로로 생리가 자주 끊겼고, 계엄령 선포 이후 영양이 부족한 탓에 몸이 마르고 생리는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였다. 아닐 거라고 애써 외면했지만, 톡톡, 아주 작은 노크처럼 안에서부터 설을 찾는 그 느낌은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설은 두려움 속에서 임신 테스트기에 소변을 묻혔다. 두 줄이 뜬 테스트기를 본 설은 유에게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유는 설을 꽉 안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속삭였다. 설에게, 뱃속 아기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유는 사흘 밤낮 고민하고, 석 달 동안 준비했다. 부하들이 시민들에게 배급될 식량을 일부 빼돌리는 걸 못 본 척했고, 본인 역시 식량을 따로 모았다. 유의 관할 구역에서도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죽었다. 어차피 이럴 것을 왜 그동안 혼자 고고한 체했느냐는 부하들의 비웃음이 유와 설의 귀에도 공공연히 들렸다. 배고픈 사람들의 절박한 항의와 그들의 심장을 뚫는 무자비한 총알, 그리고 마른 고깃덩이처럼 풀썩 쓰러지는 이들 앞에서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는 부하들을 보며 유와 설은 매일 악몽을 꿨다.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동아줄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꽉 붙들며 겨우 견뎠다.
석 달 후, 유는 모아둔 식량과 총을 가지고, 설을 데리고 탈영했다. 대피소로 가서 식량 배급 인원으로 등록을 할 수가 없었기에 산으로 도망했다. 군대에서는 산에 무리 지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산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했다. 정확한 계수는 아니었지만, 건물 지하에서 죽는 사람보다는 산에서 죽는 사람의 비율이 더 적었다. 꽤나 안정적인 군락을 조성한 산도 몇 있었다. 유는 사람이 너무 많지는 않은, 그리고 그 숫자가 크게 떨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산을 신중히 택했다. 설은 탈영하는 그날까지도 유의 계획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설은 유를 믿었다. 고되고 약해진 몸이었지만, 챙길 수 있는 약과 물품들을 가능한 많이 넣고 가방을 들었다. 출산과 그 이후 필요한 물품도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해 넣었다. 산에 들어간 첫날과 이튿날은 드물게도 구름이 짙게 낀 낮과 밤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은, 아직 태아인 겨울이까지 셋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산에서 사람을 만난 건 셋째 날 밤이었다. 기진맥진한 설과 유 앞에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이 나타났다. 무심하고 싸늘한 눈빛이었다. 유는 설을 가까이로 끌어당기고, 허리춤에 숨긴 총 쪽으로 손을 옮겼다.
- 산에 막 올라온 겐가?
- 네…….
- 머물 만한 곳은 찾았나?
- 아직…….
노인은 유가 맨 큰 가방 두 개와 마른 팔다리와 달리 볼록한 설의 배를 보더니, 몸을 돌리며 말했다.
- 따라오게.
노인이 데려간 동굴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침이 가까워오자 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도 들어왔다. 그곳은 산 밑 동네에 오래 살던 노부부와 그 아들의 거처였다.
- 상황이 워낙 딱해 보이니 며칠만 거둬주는 게야. 머물만한 곳 찾으면 나가게.
- 아유, 영감도 말 참 정 없이 하네. 여기 이 아가씨는 아기도 가진 거 같은데 쫓아내면 어떡해요.
- 아닙니다. 며칠 머물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곧 지낼 곳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후 일주일 동안 유는 노인을 따라다니며 산의 지리와 먹을 것 찾는 법을 익혔다. 산에서 다른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모두 노인이 아는 사람이었고, 노인의 중개로 유는 그들과 짧게 인사했다. 설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할머니는 불러오는 설의 배를 보며, 이런 시기에 아기를 낳으면 어쩔꼬, 어유 어쩔꼬, 걱정하면서도 설을 살뜰히 챙겼다.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노부부의 아들은 유와 설을 반기지는 않았으나, 유의 가방에서 나오는 음식을 기꺼워했다.
일주일 후, 작은 토굴을 찾아 노부부의 동굴을 떠날 때 유와 설은 가져온 식량과 일부 상비약을 노부부에게 건넸다. 노인은 여분의 낫과 도끼를, 할머니는 낡았지만 깨끗한 수건 두 장을 그들에게 주었다. 악수와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나와 둘만의 토굴에 들어가자 유와 설은 말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유가 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들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 나랑 결혼해줄래?
설은 꽃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과 안도, 걱정과 불안, 셀렘과 용기가 뒤섞여 눈물로 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앞으로의 산 생활이 고될지언정, 아기와 셋이 쭉 함께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