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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Oct 05. 2024

통성명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2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선우가 눈을 떴다. 가장 약한 밝기로 손전등을 켜고 선우는 윤을 깨웠다. 작은 소리로, 아저씨, 하고 세 번을 불렀지만 윤은 미동도 없었다. 선잠이 든 동굴 안쪽의 여자만 그 소리를 듣고 깼다. 선우는 결국 윤의 어깨를 살짝, 곧이어 조금 세게 흔들었다. 천장을 보고 있던 윤의 얼굴이 옆으로 툭, 떨어지듯 돌아갔다.


-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보세요.


놀란 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여자는 아직 자고 있는 아를 어루만지며 그 소리를 들었다. 어제 정도의 상처로 그새 죽었을 리는 없을 텐데. 낮동안 윤과 나눈 짧은 대화를 떠올리며 여자가 생각했다. 상처에 감염이 시작됐나 보구나. 윤을 계속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번져갔다. 으으음… 윤의 잇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저씨? 선우의 부름에 윤이 말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로 응답했다.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선우를 보고 윤이 힘을 짜내어 팔을 들었다. 자기 가슴에 놓인 선우의 손을 두 번 토닥였다.


- 아저씨 괜찮아.

- 손바닥이 차가워요, 아저씨. 어? 이마는 불난 것 같이 뜨거워요.

- … 괜찮아.


윤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지럽고 몽롱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도로 눈을 감았다. 여자는 옷을 잇대어 만든 아기띠로 아기를 동여매고 일어섰다. 한 손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성냥과 초를 들었고, 망설이다가 다른 손으로는 해열제를 찾아들었다. 총은 언제나처럼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선우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여자와 여전히 누워있는 윤을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여자가 선우 앞에 서자 선우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떤 말을 들을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총을 들이대고서, 밤이 되었으니 약속대로 여기서 나가,라는 말을 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 남자를 질질 끌고서 동굴 밖으로 나갈까, 혼자서라도 뛰쳐나갈까, 아니면 그저 퍼질러 울음을 터뜨릴까.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선우를 무심히 내려다봤다.


- 이거, 열 내리는 약이야.


선우가 여자의 손에서 약을 받아 들고 얼어있자, 여자는 누운 남자 쪽으로 턱짓을 했다.


- 먹이면 좀 나아질 거야.

-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줌마.


정신이 든 채 만 채인 윤의 입에 억지로 약과 물을 집어넣고 삼키게 했다. 윤의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여자의 말 덕인지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난 이제 물을 뜨러 나갈 거야.


여자는 곧이어 하려던 말,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쯤에는 여기서 나가주기 바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나가라고 한대도 남자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게 가능해 보이지가 않았다.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선우가 먼저 말했다.


-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얼떨결에 아이 둘을 데리고 나가는 밤산책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촛불 대신 선우 든 손전등이 있어서 한결 걸음이 편안했다. 여자는 동굴 주변 세 군데에 설치해 둔 덫의 위치를 알려주며 조심해서 오라고 일렀다. 선우는 여자 곁에서 야무지게 길을 비추며 씩씩하게 걸었다. 먹을 만한 물이 흐르는 계곡까지는 30분은 족히 걸어야 했다.


- 엄마, 아빠는 어디 가고 아저씨랑 걷고 있니?

- 엄마는 예전에 돌아가셨고요. 아빠는… 지하철 안에서 새엄마랑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사라졌어요.  

- 그럼 왜 저 아저씨랑 다니는 거야?

- 그냥… 아빠가 떠나고 나서부터 계속 같이 걸었어요. 일주일쯤요.  

- 그게 다야?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거 같은데?

-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 아니에요. 좋은 아저씨예요.

- 왜?

- 에너지바도 나눠주시고, 토끼고기랑 개구리고기도 같이 먹고……. 그냥 좋은 아저씨예요.

- … 그래. 그럼 너랑 저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거니?

- 아저씨가 예전에 살던 집이요.

- 그게 어딘데?

- 모르겠어요. 근데 거기는 추운 데래요. 지하철보다 여기 산보다 더 좋은 데 같아요.


여자의 품에 안긴 아기가 설핏 잠이 깨 칭얼거렸다. 여자는 아기 귓가에 쉬, 쉬, 소리를 내며 등을 도닥였다. 아기는 이내 입을 오물거리며 칭얼거림을 멈췄다.


- 아기 이름이 뭐예요?


선우가 아까보다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여자는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1년 전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남편과 몰래 산으로 숨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아기의 이름을 물은 적이 없었다. 임신 중일 때는 이런 시기에 아기를 가졌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뿐이었고, 산에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 눈에 아기가 안 띄도록 극도로 조심하기 급급했다. 지금 아기 이름을 가르쳐 준다면, 선우는 자신과 남편을 빼고 최초로 아기 이름을 아는 자가 된다. 코끝이 찡해 왔다.  


- ……겨울이야. 유겨울.  


계곡에 도착해서는 여자가 선우 손에서 손전등을 전해 받았다. 선우가 너덧 걸음 가파른 내리막을 날렵히 내려가는 동안 여자가 선우의 발 밑을 비췄다. 선우는 먼저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한껏 마시고, 자기 물통에 물을 담아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도 갈증을 해소하고 한 번 더 물을 받아 마셨다. 제 물통과 윤의 물통에 계곡물을 가득 받아서 배낭에 넣은 선우는 여자에게로 손을 길게 뻗었다.


- 아줌마 물통도 주세요.


남편이 떠나고 매일 밤 아기를 안고 물을 뜨러 오면서, 계곡의 이 내리막이 늘 불편했다. 아기를 안고, 촛불을 들고, 내려가 물을 뜨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흙바닥에 등을 쓸며 미끄러져 하나뿐인 옷이 물에 젖은 적도 있고, 초가 물에 빠져 불빛 없이 캄캄한 길을 헤매며 겨우 되짚어 온 적도 있다. 여자는 자기 물통을 선우에게 건넸다.


- 고마워.

- 별 거 아닌데요, 뭐.

- … 너는 이름이 뭐니?

- 주선우예요. 열 살이고요.

- 고맙다, 선우야.

- 겨울이 물통은 따로 없어요?

- 응, 그냥 그거 하나만 받아주면 돼.


돌아오는 길은 아까보다 수월했다. 등에 진 물통 무게만큼 걸음은 무거웠지만, 여자와 선우의 마음 각각에 경계심이 물러가고 작은 유대감이 자리했다. 겨울이의 옹알이가 어둑한 밤 산에 아늑함을 더했다.


선우가 돌아올 때에도 윤은 잠들어 있었다. 열이 나 몸이 안 좋은 탓도 있었고, 그간의 피로가 몰리기도 한 데다가, 한낮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우는 윤의 이마를 손으로 짚고는, 아까보다는 덜 뜨겁다며 안심했다. 잠을 거의 못 잔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기에 동굴 안쪽에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자 노곤함이 몰려왔다. 겨울이를 트림시키고, 놀아주기도 해야 하는데, 아직 저 남자도 동굴 안에 있는데, 내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들며 여자는 동굴 벽에 몸을 기댔다.


- 저기, 아줌마.


선우가 여자를 불렀다. 한 걸음만 더 들어오면 쏘겠다는 어제의 협박이 둘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냥 선우는 손전등을 들고 여자 근처로 와서 젤리 한 봉지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 저 밖에 나가서 먹을 것 좀 찾아올게요. 아저씨 깨면 옆에 물 있다고 좀 말해주세요.

- 먹을 걸 어디서 찾게?

- 아까 물 뜨러 갔다 오면서 몇 군데 봐뒀어요. 저, 아저씨랑 둘이 절에 있을 때도 먹을 거 잘 찾았어요. 얼른 갔다 올게요.


여자는 동굴 주변 지리와 덫의 위치를 한 번 더 알려주고 선우를 보냈다. 선우와 함께 손전등 빛이 사라지자 동굴이 온통 새카만 어둠에 묻혔다. 여자는 촛불을 켜려다가 관뒀다. 이제 초도 라이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졸린 중에도 깊게 한숨이 났다. 젖을 다 먹은 아기 등을 한참 쓰다듬고 두드리니, 끄엑, 겨울이가 트림을 했다. 엄마의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인지 젖이 양도 적고 묽은 것 같아 미안했다. 애초에 이런 세상의 도래를 짐작했음에도 아기를 가진 것 역시 늘상 죄스런 마음이었다. 여자는 겨울이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서 겨울이가 선우만큼만 자라면 그때는 지금보다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물을 뜨러 가고, 먹을 것도 구하러 다니며 둘이서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1분 1초가 한 달, 일 년이 되기를 바라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결에 더듬은 품에 아기가 없었다. 뇌와 심장에 찬물이 끼얹힌 듯 순식간에 잠이 깨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듯 을 일으켰다.


- 겨울아!


다행히 아기는 금방 눈에 띄었다. 희미한 손전등 빛 속에 앉아 있는 윤의 손을 잡고 아기가 아장거리고 있었다.


- 아기 이름이 겨울인가 보네요. 잠이 깨서 손전등을 켰는데, 겨울이가 여기까지 오더라고요. 그쪽 깨울까 하다가 너무 곤히 주무시는 거 같아서 제가 잠깐만 놀아주고 있었어요. 곧 걸음마를 하겠는데요?


여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놀란 마음을 가지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윤의 손을 놓고 여자의 다리를 붙든 아기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아직 호흡이 가빠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제 나가라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 저 근데, 선우는, 그러니까 저랑 같이 있던 아이는 어디 갔습니까?

- …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 아…… 혼자서는 위험할 텐데…….


윤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동굴 바깥에서 입구를 가린 덩굴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선우였다.


- 아저씨, 아줌마! 제가 먹을 거 찾아왔어요!


옷과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선우가 활짝 웃으며 두둑한 배낭을 들어 보였다. 겨울이가 엄마 품에서 선우를 향해 몸을 틀고 짧은 양팔을 바둥거렸다.


- 겨울아, 여기 먹을 거 어!


선우가 연 가방에서는 어른 손만 한 큰 개구리가 다섯 마리 나왔다. 아직 살아있는지 몸을 꿈틀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는 나무 열매와 풀들도 가방에 가득했다.


- 얘네들이 몰려서 자고 있는 곳을 찾았어요. 몇 마리 더 잡을 수 있었는데 도망치는 개구리는 어두워서 못 찾겠더라고요.


움직이려는 개구리를 손전등로 퍽, 쳐서 기절시키며 선우가 신나서 말했다. 네 사람은 동굴 바깥쪽 편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른나무를 모아 불을 피웠다. 둘러앉아 개구리를 불에 구웠다. 열기운이 남은 윤과 겨울이를 안은 여자 대신 선우가 서툴게 바지런을 떨었다. 바짝 익힌 개구리를 뜯어먹는 내내 선우는 뿌듯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윤이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심이 담긴 손길이었다. 고마움과 기특함, 그리고 다행이라는 진심.


- 저는 윤원진이라고 합니다. 그냥 윤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저씨라고 부르셔도 되고…. 여기 먹을 거 가져온 이 늠름한 녀석은 선우예요. 주선우.

- 아저씨, 저랑 아줌마는 이미 아까 물 뜨면서 인사했어요. 저 아기는 겨울이에요.

- 응…. 참 좋은 이름이다. 겨울.

- 유겨울이에요.

- 저 그럼… 그쪽은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설향이에요. 성이 설, 이름이 향. 그냥 설이라고 부르세요.

- 아줌마, 왜 이름을 안 부르고 성을 불러요?

- 선우야, 아줌마라고 하지 말고……, 이모라고 해.

- 네, 아저씨.


바둥거리는 겨울이를 설이 잠시 땅에 세웠다. 둥근 겨울이의 허리를 설이 양손으로 잡아주고 있었다.


- 손 놓으시면 걸을 거 같은데요.

- 아직 못 걸어요.

- 한 번 놔보세요, 아줌…, 아니, 이모.


설이 겨울이의 몸통에서 손을 천천히 떼었다. 금방 다시 잡을 수 있게 십 센티미터 정도 떼었을까. 겨울이가 한 걸음을 떼고 두 걸음을 떼며 선우 쪽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무너지려는 겨울이를 설과 선우가 동시에 잡았다.


- 우와, 걸었어요!

- 첫걸음마인가요?

- …그런 것 같아요.


겨울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와 윤이 박수를 쳤다. 겨울이를 안은 설의 눈시울이 따뜻해졌다. 하늘 멀리서 새벽빛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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