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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28. 2024

당신은 누구이기에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0화

진하사에는 나흘을 더 머물렀다. 그동안 윤은 이곳을 떠나가야 할 길을 탐사했고, 선우는 용케도 먹을 것을 잘 구해왔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토끼와 개구리, 맛과 상태가 나쁘지 않은 나무열매로 둘은 그럴듯한 끼니를 해결해 갔다. 여유와 기운이 생기자 부패 중인 스님 둘의 시신도 엉성하나마 예의를 갖춰 묻어주었다. 윤도 선우도 종교는 없었지만, 흙과 나뭇잎으로 얼기설기 덮어둔 스님들의 무덤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윤은 무사히 고향에 도달해 생존해갈 수 있기를, 선우는 아저씨와 계속 같이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좀 더 배부르게 지낼 수 있기를 속으로 소망했다. 가 닿 대상도 특정하지 못하는 어설픈 기도였으나 간절함만은 그 어떤 기도 못지않았다.


- 내일은 여기를 떠나서 동쪽으로 갈 거야.


윤이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선우에게 말했다. 선우는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 이제부터는 지금 여기처럼 아늑하고 편한 잠자리를 찾기 힘들지도 몰라. 그래도 방법은 있을 거야. 오늘 가방 잘 챙겨두고 자고, 내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출발하자. 그러니까 얼른 자.


선우는 시키는 대로 금세 곤히 잠에 들었다. 그러나 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갈 길도 어느 정도 답사했고, 잘 곳이 마땅치 않을 경우 어떻게든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 같은 잠자리도 이미 봐뒀다. 나무덩굴이 겹겹으로 우거져 낮에도 좀처럼 빛 한 조각 들지 않을 것 같은 좁은 장소를 발견해 둔 것이다. 물통도 채웠고, 절에서 찾은 칼과 도끼, 전등과 건전지도 챙겼다. 음식은 지금까지처럼 선우와 둘이 조달할 수도 있고, 가방 안에는 에너지바와 젤리도 남아있다. 그런데도 윤은 자꾸만 불안했다. 떠나온 지하주차장과 지하선로가 더 안전하고 희망적이진 않을까. 적어도 거기서는 죽진 않을 만큼의 배급 음식이 있거나, 결국은 도달하게 될 대피소가 있으니 말이다. 온전히 내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가는 것보다는,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정부와 시스템에 기대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이런 망설임으로 고향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윤은 선우가 깨지 않게 소리 죽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은 고요히 찾아왔다. 선우가 윤을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둘은 처음 땅굴에 들어올 때보다 조금씩 더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며칠 새 밤의 산이 친숙해지기도 했고, 윤이 미리 답사를 했던 터라 무난한 야행이 이어졌다. 터벅터벅 걸어 잠자리로 봐둔 곳 근처에 도착한 건 새벽 3시 무렵이다.


- 이쯤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윤과 선우는 물을 마시고, 전날 먹고 남긴 개구리 고기와 풀뿌리를 꺼내 먹었다. 입가심으로 젤리도 하나씩 씹었다. 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 시간은 족히 더 걸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렇게 더 걸어간 곳에서는 이윽고 찾아올 태양열을 피할 장소를 못 찾을 수도 있다. 음식을 다 먹고도 한동안 생각에 잠긴 윤을 두고 선우가 먼저 일어났다. 가자는 눈빛을 보내는 선우를 윤이 다시 앉혔다.


- 선우야. 저 나무덩굴 쪽으로 쑥 들어가면 낮에도 잘 수 있을만한 공간이 있어. 넌 지금부터 거기서 쉬고 있을래? 내가 혼자 얼른 앞으로 가서 이 앞에도 그런 장소가 있나 없나 찾아보고 다시 올게.


선우는 새엄마나 아빠가 떠났을 때보다 더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내가 어제랑 그제 돌아다니면서 길을 찾을 때는 여기까지 밖에 안 와봤어. 그래서 이 앞에는 뭐가 있는지 몰라. 아저씨가 짐 다 두고 얼른 갔다가 아침 되기 전에 올게. 혹시 아침까지 안 오면 혼자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아무리 늦어도 내일 밤에는 꼭 다시 돌아올 테니까.

- 싫어요……. 저도 같이 갈래요.


눈물을 참는 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윤은 대체로 의연하던 선우의 이런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 둘 다 같이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건 에너지 낭비잖아. 적당한 곳을 못 찾고 아침이 되면 큰일인 거고. 네가 체력도 아끼고 우리 짐도 지키면서 잠깐 혼자 있으면, 아저씨가 얼른 갔다 올게.

- 저도 갈래요.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잘 따라갈게요…….


아래로 푹 숙인 선우의 고개 밑으로 기어코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윤이 몇 차례 더 차분하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곳을 찾든 못 찾든 반드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선우는 듣지 않았다. 울음이 커지는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꺽꺽 애써 숨만 삼키고 있었다. 아들은커녕 조카도 본 적 없는 윤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미어졌다.


- ……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때로는 각자의 효율보다 함께의 고생이 더 기꺼울 수 있다. 어색하게 선우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이자 그제야 선우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윤은 힘주어 꼭 한 번 선우를 더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를 이렇게 안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끈적이는 살갗과 찌든 땀내, 무엇보다 지금 시기에는 가장 꺼려지는 약간의 열기에도 윤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윤의 코끝까지도 살짝 매워지려 했다.


지체된 만큼 서둘러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윤에게도 초행길이라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같이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나뭇가지에 손과 얼굴이 쓸리고 돌부리에 넘어져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선우는 열심히 윤의 뒤를 따랐고, 윤은 선우가 좀 더 편하게 올 수 있도록 한두 걸음 앞에서 길을 냈다. 새벽 여명이 하늘 끝에서부터 가느다랗게 밝아올 때부터는 전진 대신 탐색에 몰두했다. 움푹한 바위굴이나 빽빽한 덩굴 숲처럼 빛과 열이 새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다.


- 아저씨, 저기 뭐 까만 게 있어요. 저게 뭘까요?


선우가 가리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희부연 속에서 울창한 초록색 틈으로 정말 거뭇거뭇한 뭔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 풀과 나뭇잎을 거둬내자 지퍼가 달린 검은 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막 텐트였다. 산에서 연명하는 무리도 있다더니 그들 중 하나일까. 반가움과 경계심이 뒤섞인 채 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기요, 불러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삭 지퍼를 뜯어내다시피 올려보니 내부는 거미줄과 거기 걸린 잔벌레들이 온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꺾어온 나뭇가지로 윤이 거미줄을 휘휘 걷었다. 선우는 자기 얼굴만 한 나뭇잎을 주워와 윤이 걷어낸 거미줄과 벌레들을 닦아내 밖에 버렸다. 사인용 텐트쯤으로 보이는 공간이 얼추절추 치워지자, 윤과 선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 오늘은 여기서 자면 되겠다.

- 네. 캠핑 온 거 같아요.


선우가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윤도 콧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둘의 웃음소리가 공명하듯 조금씩 커졌다가 잔잔해졌다. 윤이 일어나 텐트 입구에 빛이 들지 않게 단단히 단속을 하고, 선우가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 같이 간단히 요기를 했다. 다른 날들보다 땀을 많이 흘리긴 했다만, 태양이 하늘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사정은 비슷했다. 산길을 헤치고 가다 보면, 어떻게서든 누추한 두 몸 누일 곳은 찾곤 했다. 적당한 곳을 조금 이르게 발견해 걷기를 일찍 마치는 날도 있고, 일출까지 헤매다가 이젠 정말 죽는 건가, 싶은 때 한 구석 공간을 발견해 앉아서 잠을 청한 날도 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족한 음식과 불안정한 잠자리로 체력이 조금씩 더 떨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길까지 잘못 든 탓에 산을 걸어야 할 날이 더 늘어나기도 했다. 진하사처럼 며칠 묵으며 기력을 보충할 곳이 간절했다.


유난히 불편한 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밤, 윤은 한창 걸어야 할 새벽 2시경 걷기를 멈췄다. 지도를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이 부근에는 바위굴, 어떤 것은 소규모 천연 동굴이라 부를 만한 곳이 너덧 개 존재한다. 오랜 기간 유지된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 빛과 열이 과도해진 지금, 제멋대로 뻗어가고 자라고 또 죽어버린 무질서한 산속에서, 그것도 어둠을 뚫고 작은 동굴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윤은 잠깐 전진을 멈추고 쉼이 필요할 때라고 판단했다. 선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둘은 천천히 주변을 탐색했다.


이번에도 뭔가를 먼저 발견한 건 선우였다. 우묵하게 굴이 파인 큰 바위였다. 그러나 둘이 들어가 눕기에는 너무나 비좁았다. 깊이가 얕아 한낮의 열기를 피하기도 불가능했다. 굴이 있다는 확인을 한 번 한 것에 만족하고 계속 탐색에 나섰다. 중간중간 먹을 만한 것이 보이면 주워 가방에 담기도 했다. 별 소득 없이 제자리를 맴돈 것이 세 시간. 윤은 초조한 마음에 걸어 들어가기 어려운 풀숲 사이를 억지로 헤쳐가며 뭐라도 찾으려 했다. 선우와는 손전등 불빛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윤이 다소 인위적으로 덩굴을 끌어다 둔 것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서둘러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부디, 이곳이 오늘 낮을 무사히 날 수 있는 처소가 되기를 간구하며, 걸음을 옮겼다.


- 아악!


속으로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산에 울렸다. 선우가 허겁지겁 윤의 곁으로 달려오자 윤은 가까이 오지 말라는 표시로 손을 내밀며 외쳤다.


- 선우야! 오지 마. 여기 덫이 있어.


윤은 발목께에 드리워진 실에 걸렸고, 실에 장력이 걸리는 순간 끝을 뾰족하게 깎은 한 자 길이 나무창이 날아와 윤의 종아리를 찌른 것이다. 선우는 손전등으로 발밑을 비추며 고무줄 놀이하듯 폴짝폴짝 뛰어 쓰러진 윤에게로 다가왔다. 나무창이 박힌 윤의 종아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미처 파악할 겨를도 없이 하나의 혼란이 더 찾아왔다. 덩굴로 가려진 안쪽 깊숙한 곳에서 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숨기려 지만 삐져나오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그쪽으로 다가가야 할지 그쪽에서 달아나야 할지, 윤은 선택해야 했다.


- 아저씨, 저기 안에 사람이 있나 봐요. 우리 저기로 들어가요.


선우는 창이 박힌 윤의 다리를 보며 어쩔 줄 몰했다. 윤은 누구인지는 몰라도 덫을 설치한 이가 바로 저 안에 있는 사람이리라 직감하고, 다가가기보다는 달아나는 걸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 위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은 이미 아침빛으로 밝게 물들고 있었다. 선우가 윤의 가방을 들고, 윤은 한쪽 다리만으로 앙감질 하며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겹겹의 덩굴을 걷어내니 꽤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동굴이었다.


조심스레 내부로 진입했다. 선우의 손전등 불빛 끝, 그들로부터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윤과 선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 손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총을 든 여자가 총구를 윤과 선우에게로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여자에게 안긴 아이는 여전히 응애응애 울었다. 아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고 아이를 제 품에 더 끌어안으며 여자가 말했다.


- 한 걸음 더 들어오면 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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