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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25. 2024

매일의 용기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너머> 9화

윤과 선우는 진하사 땅굴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깊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타인을 경계할 필요가 없는 둘만의 아늑한 공간이었고, 소박하나마 스님들이 쓰던 베개와 이불도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어두운 산길을 초조히 헤매던 긴장을 내려놓자 잠이 쏟아졌다. 윤은 머리를 댄 지 오 분도 안 되어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선우는 뒤척이다가 이불을 끌고 윤의 곁으로 와 눈을 감았다. 


먼저 잠에서 깬 건 윤이다. 돌아 눕다가 선우의 웅크린 작은 몸이 팔에 걸렸다. 윤은 며칠 전 알게 된 이 아이와 단 둘이 등을 맞대고 잠드는 현실이 문득 거짓처럼 느껴졌다. 이런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처음에는 선우를 짐처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한 가지 단어만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여러 마음이 교차했다. 선우가 아니었다면, 어제도 그제도 윤은 거대한 절망에 먹혀버렸을지 모른다. 윤은 가만히 손을 더듬어 선우의 허리께에 걸쳐진 삼베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주었다. 


손전등을 켜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다. 지하선로에서는 슬슬 이동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윤은 몸을 일으키고 벽에 기대앉았다. 천천히 둘러본 땅굴은 허름하나 제법 살 만했다. 지하주차장보다는 열기가 더 전해지지만 선로보다는 선선하다. 스님들이 사용한 주머니칼과 그릇, 수건, 전등, 책 몇 권도 있다. 윤은 하루이틀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오래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여기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지도에서는 진하사와 같은 곳이 더 없었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최소 일주일은 산길을 타야 하는데 윤의 계획은 일단 진하사까지였다. 일단 산에 들어가 진하사에 도착하면 이후의 길이 보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산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험했다. 지하주차장을 나올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용기가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살 길을 찾지 못한다면, 이 아이는 또 어쩐단 말인가.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우러났다. 숨결이 선우의 정수리까지 가 닿았다. 선우가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켰다.


-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지금 몇 시예요?

- 어…, 11시 반 좀 넘었어. 

- 그럼 우리 출발해요? 

- …… 좀 더 자도 돼.


선우는 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자기 가방을 열어 조금 남은 물을 절반쯤 마시고, 젤리 두 봉지를 꺼내 윤의 옆에 와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닐과 짚으로 덮인 땅굴 입구 위로 간간히 바람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선우가 윤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 아저씨, 저 밖에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 어디 가게? 

-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냥 뭐 있나 둘러보게요. 금방 올게요. 


선우 말을 듣고 나니, 윤도 요의가 느껴졌다. 아무리 익숙해졌대도 주린 배와 뻐근한 몸도 밖에 나갈 것을 재촉했다. 윤은 바닥에 놓인 여분의 손전등 하나를 선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 같이 나가자. 


선우가 먼저 올라가고 윤이 뒤따랐다. 덮개를 열고 나간 바깥은 땅굴보다 한결 온도가 낮았다. 둘은 심호흡을 하고 절의 담벼락 쪽으로 걸어가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았다. 마신 게 적다 보니 나오는 것도 많지 않았다. 윤은 선우에게 땅굴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 것,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즉시 땅굴로 돌아올 것, 일단 각자가 가진 시계를 보며 2시에는 땅굴 입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선우에게 주입시켰다. 선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전등을 들고 절의 입구를 나섰다. 윤은 선우의 손전등 빛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절의 또 다른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향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식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최대한 길을 익혀둘 작정이었다. 


어제보다 훨씬 걸음이 가벼웠다. 어둡고 험한 건 마찬가지이나 무거운 가방도 없고 돌아갈 곳도 있다. 윤은 가느다랗게 흐르는 계곡 물줄기를 찾아 목을 축이고 물병을 채웠다. 빈 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식용 가능해 보이는 열매와 풀을 땄다. 윗옷을 벗어 임시 주머니로 쓰자니, 무성한 나뭇잎과 가지에 피부가 쓸렸다. 그래도 윤은 불안이 다소 물러나고 기분이 맑아졌다. 트인 하늘, 고이지 않은 공기, 미친 더위에도 기어코 살아남은 자연의 생명 하나하나가 한 톨의 희망 같았다. 하루새 살짝 차오른 달이 간간이 윤의 발길을 밝혔다. 


더 둘러보려다가 시계를 보고 발길을 돌렸다. 윤은 2시에 맞춰 땅굴에 도착했지만 선우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굴에 들어갔나 살펴봤지만 역시 선우는 없었다. 채취한 식량을 내려놓고 옷을 입었다. 엇갈릴까 봐 멀리 가진 못하고 선우가 나간 절의 입구를 서성였다. 어둠에 대고 이름도 몇 번 불러봤으나 밤의 산은 고요했다. 불안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작은 불빛 하나가 콩콩콩 윤을 향해 달려왔다. 선우였다. 


선우도 아까의 윤처럼 윗옷을 벗어 뭔가를 담아왔다. 앙상한 몸에 잔상처가 나있었지만 선우는 신난 얼굴이었다. 울상이던 윤의 얼굴도 비로소 편안히 펴졌다. 


- 아저씨, 아저씨, 이거 보세요. 


선우가 숨을 몰아쉬며 윤의 앞에 멈춰 섰다. 옷을 열어 보니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산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 어제 오다가 토끼가 몇 마리 죽어 있는 걸 봤거든요. 이미 막 이상하게 뭉개진 애들도 있는데, 이건 괜찮아 보였어요.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둘은 절간을 뒤져 냄비와 가스버너를 찾아냈다. 윤이 토끼의 털을 벗기는 동안 선우가 계곡으로 가서 물을 받아왔다. 윤의 손길은 서툴렀고, 계곡은 말라서 물이 간신히 흐르고 있었으므로, 식사 준비에는 긴 시간이 들었다. 가까스로 음식이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여명이 밝아왔고, 윤과 선우 모두 생고기라도 뜯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허기가 극심했다. 고기 삶는 냄새 탓에 더 그랬을지 모른다. 윤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음식을 그릇에 담고 조심히 땅굴로 내려갔다. 나무 열매와 잎들까지 곁들이니 실로 오랜만에 채소와 고기가 곁든 밥상 - 밥은 없었지만 - 을 마주한 셈이었다. 뜨끈한 국물을 먼저 한 모금 삼키고 고기를 씹자 입안에 들어차는 고소한 육즙에 윤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선우도 허겁지겁 토끼 고기를 삼켰다. 살 한 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나니 비로소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둘은 잠에서 깨어 땅굴을 나가기 전처럼 나란히 벽에 기대앉았다. 비스듬히 앉아 배에 손을 올린 선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여기가 지하철보다 훨씬 좋은 거 같아요. 

- 그럼 우리, 계속 여기에 있을까? 

- 이 땅굴에요? 

- …응. 

- 여기가 원래 아저씨가 가려던 데였어요? 

- ……아니. 

- 아저씨가 가려던 곳은 어딘데요?

- 내가 옛날에 살던 집. 

- 거긴 어떤 데예요? 여기보다 더 좋아요?

- 글쎄……. 예전에 거긴 아주 추웠어.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 그럼 그리로 가요, 같이.  


선우는 스르륵 바닥에 몸을 붙이며 누웠다. 윤이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가 선우의 잠자리를 챙겼다. 새근새근 잦아드는 선우의 숨소리를 들으며 윤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 그런데 거긴 춥기도 했지만 아주 쓸쓸했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적응한 곳을 떠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한낮의 열기가 마구잡이로 사람을 쓰러뜨리는 이런 무자비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윤에게는 막상 고향집을 향하고 마주하기 위해서도 용기를 짜내야 했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물과 음식, 잠자리만은 아니구나. 윤은 선우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색색 잘도 자는 선우의 호흡이, 같이 그리로 가자는 선우의 대답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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