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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18. 2024

산 속 탐험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7화

달은 오른쪽이 둥글고 왼쪽이 파였다. 별은 빼곡했다. 모두 모아 놓으면 달보다도 밝을 별들이다. 열기는 남아 있지만 탁 트인 공기를 오랜만에 마시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우는 하늘을 보며 걷느라 자꾸만 넘어질 뻔했다.


- 조심해. 얼른 오고.

- 네.


침착한 척 말했으나 윤의 걸음도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느려졌다. 두려움과 망설임의 무게가 걸음마다 쌓여 갔다. 진입을 앞둔 산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지하 주차장 탈출을 계획하면서 지도를 보고 산세와 방향을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산은 지도와 달랐다. 짙은 어둠 속에서 산은 한층 더 새까만 실루엣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를 본다는 건 사람이 산을 작게 줄여 산보다 커다란 존재로서 산 전체를 내려다보는 행위다. 사람은 산을 안다고, 산을 이용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진짜 산은 깊고 너른 몸으로 수천수만의 생명을 품어낸다. 반대로 한두 개의 목숨이야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집어삼킬 수도 있다.  


윤은 진입로에서 갈등했다. 여기를 헤쳐 걸어 집에 도착하기는커녕 오늘 해가 뜨면 쓰러져 죽는 건 아닐까. 다시 지하 선로로 돌아가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손전등을 들고 멈춰 선 윤을 선우가 앞질렀다. 두세 걸음 앞에서 선우가 윤을 돌아봤다.


- 아저씨, 안 가요?


노란 전등빛을 받은 선우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열기에 달아오른 탓도 있고, 설레서 상기된 탓도 있다. 선우는 바깥 공기를 마신 것이 윤보다도 더 오랜만이었고, 이토록 많은 별을 올려다 본 것은 열 살 인생의 처음이었다. 그 얼굴에는 옅게나마 죽음보단 희망이 어려 있어서, 윤의 발목을 잡아끄는 두려움이 조금은 물러갔다.


- …가야지. 가자.


산을 오르니 좋은 점 하나와 나쁜 점 하나를 즉각 느낄 수 있었다. 나쁜 점은 어둡고 험한 길이다. 작은 손전등으로는 발 앞 한 뼘도 다 밝히기 어려웠다. 발에 채이고 걸리는 게 많아 세 걸음에 한 번씩은 휘청거렸다. 지하에서는 쭉 한길로 난 선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됐다. 산은 다르다. 기온이 치솟으며 덩달아 제멋대로 무성해진 풀과 나무가 한때 길이었던 등산로를 덮어버렸다. 멀리서나마 빛을 보태던 달과 별도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건지 땅굴에 들어가는 건지 조도만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윤은 선우에게 바짝 붙어 걸으라고 말했다. 선우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좋은 점도 있다. 산에 들어서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다소나마 가셨다. 아스팔트 길은 한낮의 태양열을 어떻게든 길 밖으로 토해낸다. 열 받은 걸 삭이지 못하고 이글거리고 분노한다. 흙과 나무는 다르다. 열을 가만히 받아내고 흡수한다. 들어오는 것을 소화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받은 그대로 내뿜거나 추악하게 싸지르지 않는다. 아스팔트나 흙은 매개체일 뿐이지만 거길 밟고 선 인간은 그 차이를 느낀다. 정상적인 온도만 경험한 이들에게 지금 윤과 선우의 체감 상황을 최대한 전달하자면, 겨울옷을 입고 사우나에 들어앉은 사람이 코트와 기모 바지를 한 벌씩 벗은 기분 정도가 되겠다.


발이 산길에 익숙해지고 눈이 어둠에 적응하나 싶을 때쯤 새벽 여명이 밝아왔다. 부드러운 빛에 자태를 드러내는 나무와 꽃이 싱그러웠다. 선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윤도 잠시 평온한 새벽 풍경에 마음이 일렁였다. 판판한 바위에 앉아 호흡을 고르고 허기를 달래고 싶었다. 그러나 윤은 양손으로 두 뺨을 세게 치며 정신을 잡았다. 선우의 손을 잡고 걸음 속도를 높였다. 빛은 곧 열을 불러올 터였다.


둘은 동이 튼 직후 가까스로 진하사를 찾아냈다. 지도에서 본 작은 절이다. 윤은 이곳에서 한낮의 살인적인 – 관례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 더위를 피할 수 있길 바랐다. 간혹 산속 절에는 석빙고처럼 서늘한 공간이 있다는, 진하사도 그중 하나라는 소문을 들었다. 산에 오르면서 점점 호흡이 편해지는 것도 윤의 기대를 부풀렸다. 그러나 절에 들어서자 기대가 급격히 꺼져갔다. 입구를 지나 사찰 가까이로 갈수록 냄새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맡았지만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살덩이가 문드러지고 부패하는 냄새.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멧돼지나 고라니, 토끼일 수도 있어. 윤은 불안을 달래며 천천히 절 곳곳을 훑었다.


윤의 바람은 빗나갔다. 사찰 마루에는 엎어진 채로 죽은 시체가 있었다. 하의뿐이나 통 넓은 회색 승복, 부패만 아니었다면 반들반들했을 머리가 스님임을 짐작게 했다. 다른 시체 한 구는 절 뒤 흙바닥에 누워있다. 마루에서 죽은 스님이 먼저 죽은 큰 스님을 묻으려고 밤에 삽을 들고 땅을 파다가, 이러다 나도 죽겠다, 싶어서 대피하던 중 마루까지밖에 못 가고 쓰러진 것이다.


막막하다. 이제 곧 일출인데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역시 지상으로 올라온 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던가. 이제는 나도 죽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윤은 고개를 숙였다. 새벽빛이 부드럽게 어둠을 물리고 있었다. 이제 곧 사형집행자인 태양이 찾아올 것이다.


- 아저씨.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선우가 옆에 없었다.


- 아저씨, 여기요.


윤은 모퉁이를 돌아 소리 나는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항아리 뒤로 선우의 머리가 호박처럼 땅에서 솟아 있었다. 치켜들고 흔드는 손이 어슴푸레 보였다.


- 여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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