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있었던 일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8화
진하사는 세 명의 스님이 사는 작은 절이었다. 더위가 극악해지자 세 스님은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장독을 묻던 땅을 더 깊게 파고 옆으로 공간을 내는 작업이었다. 땅을 파던 중 몸이 약한 막내 스님이 땀에 절어 쓰러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다른 두 스님은 땅굴에서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얕게 땅을 파 죽은 동료를 묻었다. 그리고 사흘 후, 죽음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땅굴이 만들어졌다.
두 스님은 낮에는 땅굴에서 잠을 자고 밤에는 법당으로 올라가 삼천 배를 드렸다. 절을 마치면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굴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고단한 몸이라 잠은 잘 왔으나 장독의 식량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이내 작은 스님은 밤에 백팔 배만 드리고 산으로 먹을 걸 구하러 나갔다. 큰 스님은 우직하게 매일 삼천 번씩 무릎을 꿇었다. 둘은 서로의 행보를 말없이 응원했다. 큰 스님은 절을 하며 밖으로 나간 작은 스님의 무사를 빌었고, 작은 스님은 큰 스님의 먹을 것까지 고려해 어두운 밤 산을 뒤졌다. 작은 스님의 요령 덕인지 큰 스님의 갸륵함 덕인지 둘의 곡기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큰 스님의 무릎이었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통증이 생기더니 펴고 일어날 때는 천천히 조심하지 않으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삐걱거리는 왼쪽 무릎 때문에 큰 스님은 오른 무릎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이튿날부터 양 무릎이 같이 삐거덕거렸다. 그래도 큰 스님은 기어코 삼천 번을 채웠다. 밤 깊어 시작하여 이른 아침 끝나던 삼천 배가 아홉 시, 열 시까지 늘어졌다.
- 스님, 몸도 안 좋으신데 일천 배만 하시지요.
- 허허, 이 사람아, 고통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내야 하는 것일세. 일천 배가 웬 말인가. 나는 괜찮네.
큰 스님은 땅굴을 오르내릴 때는 물론이고, 법당 앞까지 걸을 때도 부축이 필요했다. 온전히 작은 스님의 몫이었다. 큰 스님을 등에 업고 땅굴을 기어올라가면 얕게 숨이 찼다.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허리를 부축해 질질 끌다시피 법당에 데려다 놓으면 이미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절을 할 때는 느릿하고 절룩여도 나름 제 다리로 앉고 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몸을 의지할 때는 아예 힘 줄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이전에 작은 스님은 큰 스님을 우러러봤다. 그러나 이제 큰 스님은 몸이 무겁고 살이 끈적한 노인네에 불과했다.
어느 날, 작은 스님은 기력이 없다는 이유로 땅굴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력이 없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진짜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어떻게든 혼자 기어 올라가시든지, 그럴 수 없다면 당신 때문에 고생하는 나를 생각해서 삼천 배를 관두시든지, 뭐라도 좀 하라는 소심한 반항이었다. 그날 큰 스님은 땅굴 안에서 아홉 시간 – 그가 삼천 배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 동안 목탁을 두들기고 법문을 웅얼거렸다. 작은 스님은 비좁은 곳에서 귓속을 파고드는 목탁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출가를 후회했고, 두 시간이 더 지나자 저놈의 둥그런 목탁을 빼앗아 발로 밟아 으깨버리고 싶었다. 거기서 두 시간이 더 지나자 목탁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큰 스님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깨지고 조각난 목탁과 머리통을 상상하니 기분이 통쾌했다. 비로소 조용해진 땅굴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은 스님은 어지러운 머리와 벌게진 눈, 잘게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으로 어떻게 하면 저 시끄러운 두 둥그런 물체들을 한 번에 깔끔하게 박살 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몇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추리던 작은 스님의 목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손으로 쓸어내니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손바닥에 옮겨 붙었다. 개미는 가느다란 여섯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손바닥 안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개미의 움직임을 느낀 작은 스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삼십 년 동안 개미 한 마리 안 죽이려 노력해 온 내가 살생 중의 살생, 그것도 큰 스님을 살생할 생각을 품다니! 게다가 이 모든 번뇌는 나의 잔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롤러코스터처럼 급변하는 감정에 멀미라도 하듯 작은 스님은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부처님, 아이고, 스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앞뒤로 몸을 흔들며 고개를 주억대며 한참을 꺽꺽거렸다. 그런 작은 스님 옆에서 큰 스님은 계속 동일한 박자로 목탁을 두드렸다. 옳지, 이놈. 드디어 깨달았구나!
다음날 작은 스님은 큰 스님을 업고 땅굴을 나섰다. 법당에 도착한 두 스님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삼천 배를 했다. 절을 마친 후 둘은 한 덩어리로 휘청거리고 비틀거렸다. 땅굴까지 걸어오며 세 번을 넘어졌고, 땅굴로 내려가는 길에 흐물대는 작은 스님 등에서 팔이 풀린 큰 스님이 얼굴을 흙벽에 갈며 미끄러졌다. 그래도 둘은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만 낼뿐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비축해 둔 식량이 동났다. 이번엔 큰 스님이 앓아누웠다. 절하러 올라갈 생각도, 땅굴에서 목탁 칠 생각도 없이 등을 옹송그리고 누워만 있었다. 먹을 걸 구해오라는 암시였다. 작은 스님은 혼자 법당에 갔다. 천천히 삼천 배를 다 하니 평소보단 조금 이른 때였다. 그는 절뚝거리며 홀로 산속에 들어갔다. 도토리를 몇 알 줍고 접시만 한 해바라기에서 씨앗을 받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어 더 찾진 못했다. 한 움큼 받아온 계곡물에 씨앗을 불려 먹었지만 두 스님은 영 힘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두 스님은 여느 때처럼 함께 올라가 절을 시작했다. 이천삼백오십팔 배,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어나는 작은 스님에게 큰 스님이 말했다.
- 삼천 배를 다 드렸으니 오늘은 이만 같이 산에 들어갔다 와보세.
작은 스님은 대답 없이 열두 번 더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큰 스님은 몸과 마음은 바짝 말라 들어갔다. 그러나 둘의 몸과 마음 상태는 크게 다를 수 없었다. 작은 스님도 무릎을 털고 돌아섰다.
- 그렇게 하시지요, 스님.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먹을 걸 찾기는커녕, 한 걸음 떼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사흘 뒤 큰 스님이 첫 번째 절을 드리기 위해 몸을 수그린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이틀 후 큰 스님을 끌고 나가 묻어주려다가 작은 스님도 쓰러지고 말았다.
이게 윤과 선우가 도착하기 나흘 전 일이다.
밤새워 절을 하던 두 스님의 마음은 지극했다. 서로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이마를 바닥에 삼천 번씩 붙이는 정성은 거짓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죽을 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이 지극한 정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다. 가만히 있기를 죽기보다 못 견디는 인간의 습성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은 절망 속에서 신기루라도 상상하며 희망을 붙들려는 시도다. 실제로는 무의미하더라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절박한 노력이기도 하다. 원래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살아왔다. 지구가 태양에 한 걸음 성큼 다가가기라도 한 듯 기온이 솟구치기 전에도 그래왔다. 그때는 시간을 흘려보낼 방법이 더 다양했고 그렇게 해도 당장 죽지 않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