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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14. 2024

동행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6화

무리가 이미 고기를 먹고 있을 때 윤과 아이가 역에 도착했다. 그들이 플랫폼으로 올라오자 남자들이 턱짓을 하며 그들을 가리켰다. 전에 윤에게 같이 나갈 거냐고 묻던 남자가 고기를 손에 든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짙어지는 고기 냄새에 윤의 위장이 진동했다. 겨우 재운 허기가 냄새에 자극을 받아 윤을 집어삼킬 만큼 커졌다. 받아먹을까? 거절할까? 먹고 싶다. 먹어야 한다. 사람 고기라도? 그게 뭐라도. 먹고 싶다. 윤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남자는 윤을 지나쳐 아이 앞에 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손목시계를 꺼내 아이 앞에 툭 떨어뜨렸다.


- 이건 네가 가져라.


그는 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기를 씹으며 뒤돌아 갔다.


거울이 있었다면 윤은 그때 자기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남자가 멀어질 때 윤은 허탈감과 실망감, 절박함으로 거의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 뻔했다. 그가 지체 없이 돌아서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윤은 침울한 얼굴로 가방에서 에너지바를 꺼냈다. 간신히 허기를 면하고 겨우 하루를 살 만큼만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딱딱한 데다가 별맛이 안 나는 배급 음식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보름 치밖에 남지 않은 귀한 음식.


아이는 남자가 주고 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제서야 윤도 시계를 봤다. 이틀 전 아이 아빠의 손목에 있던 명품 시계, 세상이 이렇게 끓어오르기 전에 윤의 연봉보다 높은 가격의 시계다. 이게 지금 주인 없이 던져진 이유는 뻔했다. 아이 아빠는 죽었다.


그는 여자를 못 찾고 헤매다가 배가 고파 고기를 찾으러 올라갔다. 시체는 있었지만 칼이 없었다. 칼 대신 벨트의 금속 부분과 손톱을 활용해 살점을 뜯어내려 했다. 죽은 피부와 근육은 질겼고, 힘을 주는 남자의 검지 손톱이 뒤로 꺾였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와 선홍빛 피가 그의 손끝에서 섞여 들었다. 한참을 더 씨름한 끝에 남자는 가까스로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그것을 자동차 보닛 위에 올렸을 때 태양은 이미 세차게 이글대며 모든 것을 말리고 태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살점이 서서히 익어가는 동안 그는 쓰러졌다. 무리의 남자들이 그를 발견한 건 다음날 아침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파악했다. 남자가 살점을 뜯은 시체와 남자의 시체 중 무엇을 택할지 잠시 논란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는 사람은 좀……, 이건 이미 부패가 시작됐다고, 아예 다른 걸 찾아볼까, 점점 찾기가 어려워지는 거 같은데, 이제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것들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지, 그럼 그냥 먹어,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고깃덩이인 건 같잖아, 썩었냐 안 썩었냐의 차이만 봐야 한다고, 안 그럼 우리도 죽어, 그건 그래…….


윤은 시계를 만지는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아이는 지치고 고단한 눈빛이었다.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더니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아이의 모습은 둥글고 외로워 보였다.


- 배 안 고프니?


에너지바를 아이에게 내밀며 윤이 물었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가엾은 마음과 부담스러운 마음에 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윤이 잠에서 깼을 때, 아이는 젤리를 꺼내 먹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는 중이다. 화장실에 가려고 윤이 일어나자 아이가 가방을 메고 급히 따라 일어났다.


- 화장실 갔다 올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멘 채로 화장실까지 따라왔다.


똥오줌 냄새가 심하지만 아무 벽보다는 소변기 앞이 편했다. 쪼르르륵,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누고 세면기로 갔다. 운이 좋게도 깨끗한 물이 나왔다. 미지근하지만 이게 어디냐, 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껏 물을 마시고 물병을 채웠다. 아이도 따라 했다. 그들이 플랫폼으로 돌아올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윤이 선로로 내려갔다. 아이도 윤을 바짝 따랐다.


- 난 오늘부터 좀 많이 걸을 거야.


아이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숨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웃자란 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다. 부잣집 첫째 아들임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지만, 제 딸이 있는 새엄마 밑에서 자란 큰 애임을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네가 그만 걷고 싶거나 날 따라오지 못해도 내가 널 기다려줄 수는 없어, 이 말을 할까 말까 윤은 망설였다. 입을 열었지만 다시 다물었다. 심호흡만 한 번 하고 손전등을 켰다.


그날 아이가 윤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변비와 치질에 시달리던 윤이 아이를 30분이나 멈춰 세우고 큰 신세까지 졌다. 아이 가방에서 나온 물티슈와 손수건이 아니었다면 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주 고역이었을 것이다. 찝찝하고 쓰라린 정도가 아니라 찢어지고 헐고 짓물러서 걷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이가 건넨 새 손수건, 명품 로고가 박힌 이 손수건은 본래 만들어질 때 예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쓰임새보다 훨씬 더럽고 험한,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손수건보다 유용하고도 절박한 용도로 사용됐다. 이런 시대에 손수건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몫을 해냈기에 이 손수건은 일회용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들의 세계와 역사라는 것이 있다면 이 일이 영웅으로 기록될지 수치로 기록될지 생각해 볼 만하다.


이렇게 윤과 아이는 하루를 더 걸어 내목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아홉 시 반 무렵. 윤은 잠을 충분히 잔 후, 자정이 되면 밖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 난 내일 여기서 나가 밖으로 올라갈 거야.


에너지바를 한 입 꼭꼭 씹으며 아이가 윤의 눈을 바라봤다.


- 너도 알다시피 밖은 많이 덥고 위험해. 죽을지도 몰라.


아이가 에너지바를 꿀꺽 삼켰다. 윤은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젤리를 입에 넣었다. 말캉한 식감과 새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초라한 식사를 마치고 윤이 말했다.


- 같이 갈래?


지하 선로를 함께 걸은 후 처음으로 아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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