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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11. 2024

굶주린 걸음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너머> 5화

아이는 자기 가방을 메고 윤을 따랐다. 윤은 가끔 뒤를 돌아서 아이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 현수라고 했나?

- 선우요. 주선우.

- 걷는 거 힘들지 않니?

- 네.


윤은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럴 땐 말을 안 하면 되는데 가끔 윤은 안 해도 될 말을 하곤 했다. 사실 윤의 입이 특별히 가볍다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이 윤과 비슷하다. 말을 꼭 해야 할 때만 하는 현명한 사람은 드물다.


- 선우는 아빠를 만나고 싶니, 엄마를 만나고 싶니?


열 살 아이를 대해본 적 없는 이의 유치한 질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대답으로 윤의 의아함 하나는 해소됐다.


- 엄마 아니에요.

- 어? 엄마가 아니었어?

- 새엄마예요.

- 아…….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윤보다는 현명한 편이었다. 중간에 아이가 가방에서 젤리를 한 봉지 꺼내 먹으며, 가만히 윤에게도 곰돌이 젤리를 세 개를 내밀었다. 괜한 말보다는 훨씬 힘이 되는 나눔이다.


윤은 남자와 조만간 만날 거라고 계산했다. 여자를 찾지 못한 남자는 길을 거슬러 올 것이고 갈림길 없는 이 선로에서 엇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를 꼬박 다 걷고 무리가 선로에서 플랫폼으로 기어오를 때까지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날의 계획대로라면 윤은 가던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러나 윤의 발꿈치만 보고 걸어온 아이를 두고 갈 수도 데리고 갈 수도 없어서 난감했다. 하루만 더 무리와 동행하기로 하고 아이를 들어서 위로 올렸다. 팔을 뻗어 자기 몸을 끌어올릴 때는 어제보다 힘이 들었다. 먼저 플랫폼 바닥으로 올려 걸친 왼쪽 다리를 아이가 붙들고 당겼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수월했다. 윤은 적당히 자리를 펴고 아이와 함께 앉았다.


아이의 아빠를 빼고 어제와 같은 남자들이 계단참에 모였다. 그중 한 남자가 회칼을 들고 윤에게 다가왔다.


- 어이, 같이 나갈 거요?


윤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표정을 할 의도는 없었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남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윤은 에너지바를 하나 꺼냈다. 아이가 젤리 두 봉지를 꺼내서 둘은 그것들을 나눠 먹었다. 겨우 허기만 달래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한 시간 후쯤, 그러니까 오전 아홉 시 무렵 남자들이 돌아왔다. 전날처럼 투명 비닐봉지 안에 핏물이 밴 고깃덩이가 들어 있다. 조금 전까지는 인간의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덩어리다. 오늘은 아주 싱싱해, 좀 전에 막 쓰러진 모양이지, 멍청한 새끼, 우리도 땡볕에 더 오래 있었으면 못 내려왔을지도 몰라, 망할 놈의 더위, 내일부터는 좀 더 일찍 올라가야겠어, 그럼 익히는 데 시간이 더 걸리잖아, 미디엄 레어로 먹으면 되지, 지금이 미디엄 레어야, 그럼 내일부터는 레어다, 하하, 그러자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근대며 고기를 나눴다. 칼을 든 세 명이 가장 큰 덩이를, 다른 두 명이 그보다는 조금 작은 덩이를 가졌다. 그리고는 각자 동행하는 여자에게 가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자 둘은 양이 적다며 불평을 했다.


윤은 땅에 몸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구부렸다. 바닥에 가까운 귀는 팔에 붙여 막고, 천장에 가까운 귀는 다른쪽 손으로 막았다. 그래도 소리가 들린다. 덜 익은 살코기에 이빨이 박히며 육즙과 핏물이 짜이는 소리, 턱관절이 벌어지며 고기와 이빨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체되는 소리,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서 살덩이가 침과 섞여 뭉개지고 으깨지는 소리, 죽음과 삶이 얽히고설켜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넘어가는 소리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배가 꼬르륵거린다.


아이는 윤 가까이에서 엎드려 잠이 들었다. 윤은 팔을 뻗어서 아이의 맨 종아리를 꾹 찔러본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살이 살짝 파였다가 차오른다. 새근대는 숨소리에 따라 아이의 등이 살포시 부풀었다 줄어든다. 윤은 아이에게서 떨어져 눈을 감는다. 전날 잠을 못 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허기와 공허 속에서도 윤은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이가 윤을 흔들어 깨웠다. 같이 걷던 무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손목시계의 짧은바늘이 1를 지나 2에 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기랄. 자정 전에는 일어나서 아침 일고여덟 시까지 활동하는 게 더위를 피하기에 가장 좋은 패턴인데. 오늘부터는 무리보다 한두 정거장 더 걸을 생각이었으나 시작부터 꼬였다. 윤은 가방을 꾸리고 선로로 내려갔다. 아이는 혼자 힘으로 폴짝 뛰어내려 윤을 따랐다.


마음이 조급했다. 걸음 속도를 높이니 아이가 뛰다시피 쫓아오다가 두 번 넘어졌다. 처음에 윤은 되돌아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켰다. 두 번째로 종종 대는 걸음이 콰당 소리로 멈춰졌을 때 윤은 못 들은 척 계속 앞으로 걸었다. 손전등이 없는 아이는 어둠 속에서 혼자 일어나 달려왔다. 달리면서 또 넘어졌고, 아이는 다시 벌떡 일어나 훌쩍이며 뛰어왔다. 윤의 뒤에 바짝 붙어서 몰아쉬는 아이의 숨소리에 눈물과 콧물이 섞였다. 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속상하다가 이윽고 화가 났다. 아무리 새엄마라도 그렇지, 자기 딸만 쏙 데리고 음식 다 가지고 튀어버리는 게 어딨어, 아빠란 사람은 애를 데리고 가든가 해야지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애를 맡기고 왜 여태 안 나타나는 거야, 책임감 없는 부모는 애를 못 낳게 법을 만들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윤은 남자에게 여자가 간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나, 아이를 맡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어야 했나, 아까 늦잠을 자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자신의 행동도 자책했다. 오늘도 아이 아빠를 만나지 못하면 무리의 다른 사람들에게 애를 맡기고 혼자 떠나는 수밖에 없다.


콰당, 다시 대차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윤이었다. 어두운 길과 빠른 걸음, 온갖 잡념은 사람을 넘어뜨리기 좋은 조합이다. 제법 요란하게 고꾸라져서 무릎과 손바닥에 통증이 상당했다. 손전등은 저 앞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넘어진 윤을 앞질러 손전등을 향해 갔다. 욱씬거리는 고통 속에서도 윤은 고개를 들어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선로에서 앞으로 한 걸음씩 멀어져가는 아이를 보자 문득 겁이 났다. 아이가 손전등을 들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윤은 빛 없이 버려진다. 서둘러 일으키려는 몸이 삐걱대며 더 큰 아픔을 유발했다. 


아이는 멀어질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뒤를 돌아 윤에게 돌아왔다. 자그마한 손전등 빛이 커지며 주저 앉은 윤의 얼굴을 잠시, 그리고 팔과 다리를 순서대로 비췄다.


- 아저씨, 괜찮으세요?

- …어.


윤은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손전등을 든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 얼굴을 보니 윤은 울컥 목이 멨다. 몸의 안과 밖이 고르게 아팠다. 윤이 천천히 일어나 호흡을 고르는 동안 아이는 옆에서 얌전히 서 있었다. 윤이 걸음을 떼자 아이는 한 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그 와중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손전등으로 윤의 발앞을 비췄다. 윤은 아이 손에서 손전등을 받아 들었다. 아이가 숨차지 않을 속도로 둘은 종일 함께 걸었다.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으면 젤리를 씹었고, 얼마 못 가 더 큰 허기가 몰려오면 침을 삼켜가며 걸었다. 피로와 통증에 익숙해지며 그들은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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