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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Sep 07. 2024

고아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4화

지이익, 조용히 지퍼를 여는 소리가 났다. 윤은 잠꼬대를 하는 척 몸을 돌렸다. 뒤척이는 윤을 보고 여자는 손을 멈춘다. 윤이 움직이지 않자 여자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녀는 가방에서 필요한 것을 추려 트렁크에 넣는다. 이미 그 안에 있는 물과 음식을 빼지는 않는다. 잠시 망설이더니 남자의 머리맡에 놓인 칼도 챙긴다. 빵빵해진 트렁크를 잠그고 그녀는 여섯 살 딸을 업는다. 아이는 엄마 등 위에서 축 처진 채 잠들어 있다. 남자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잔다. 여자는 트렁크를 끌고 선로로 다가간다. 어떻게 내려갈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잠든 딸을 바닥에 누인다. 트렁크를 먼저 아래로 조용히 떨어뜨리고 자신이 내려간다. 팔을 올려 딸을 잡는다. 그리고 돌돌돌돌 소리를 내며 트렁크를 끌고 어두운 선로 속으로 사라진다.


윤은 몸을 뒤집어 가며 실눈을 뜨고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배낭 대신 트렁크를 택한 여자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했다. 딸은 데리고 가면서 아들은 두고 가는 마음을 의아해했다. 걸어갈 길이 아닌 걸어온 길을 향한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궁금했다. 윤은 여자가 트렁크에 넣은 칼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지 않고 살리는 데 쓰이길 바랐다. 그 둘이 다를 바 없다는 건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다.


훌쩍, 코를 삼키는 소리가 났다. 제 아빠 옆에 누운 남자아이의 등이 가늘게 들썩이고 있다. 한숨과 피로로 감기던 윤의 눈이 다시 뜨였다. 아픈 걸까. 우는 걸까. 작고 둥글게 말린 아이의 등은 외롭고 – 지금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 몹시 추워 보였다.


사실 아이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윤은 몰랐지만 가방을 챙기던 여자의 눈이 아이의 겁먹은 눈과 잠깐 마주치기도 했다.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워낙 빠르게 외면했기에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는 짧은 눈 맞춤이었다. 아이는 여자를 붙잡지도 남자를 깨우지도 못했다. 숨죽여 울 뿐이었다.


- 뭐야? 어디 갔어? 어?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남자가 거칠게 좌우를 둘러봤다. 칼과 트렁크가 없어진 것에 당황하고 여자가 안 보이는 것에 화를 냈다.


- 선우 너, 엄마 못 봤어? 엄마 어디 갔는지 몰라?


남자가 아이의 두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며 물었다. 아이는 빳빳하게 굳어서 물기 어린 눈만 깜빡였다.


분에 못 이겨 우왕좌왕하는 남자를 무리의 다른 사람들이 지켜봤다. 남자는 다시 아이를 잡고 말했다.


- 주선우, 아빠가 엄마랑 유진이 찾으러 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아저씨들 따라서 걷고 있어. 알겠지?


아이의 발갛게 부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아빠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이 아저씨, 이 아저씨랑 같이 잠깐만 있어.


남자는 가까이에 선 윤의 팔을 끌어다가 아이의 어깨에 얹었다.


- 좀 부탁합시다. 금방 올 거요. 애 데리고 가방 끌고 가봤자 얼마나 갔겠어, 씨발. 먹을 걸 다 들고 튀다니, 이 썅년, 잡히면 확…….


윤이 뭐라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남자는 선로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빨리 가도 아내와 딸을 찾을 수 없는 방향으로 그는 전속력을 다해 뛰었다. 무리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 동요도 하지 않았다. 꼴좋다는 비웃음을 보내는 남자도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셋 중 하나일 것이다. 1번, 여자와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2번, 여자가 가지고 튄 식량과 칼이 필요하기 때문에. 3번, 괘씸한 여자를 잡아 족치고 싶기 때문에. 윤은 일단 1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이성적이라면 2번, 감정적이라면 3번이지 않을까 추정했다. 세 가지 보기가 모두 답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이런 윤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타당했다. 그러나 만약 남자가 여자를 찾아내 한 번 더 손찌검하고, 지금까지처럼 음식을 구해다 함께 먹고, 이 덥고 어두운 길을 다 걸어 결국 최북단 대피소에 살아 도착한다면, 그들은 같이 얼싸안고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그럼 1, 2, 3번 모두가 답이 된다. 중간에 한두 과정이 빠진다면, 답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찾으려는 이유는 밀폐된 상자에 든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꺼내 보기 전까지는 어떤 답이 맞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자의 상자는 아마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유 같은 것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 윤은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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