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와 생활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2화
- 우리도 이쯤에서 물 좀 빼고 갈까요.
남자는 트렁크를 세우고 세 걸음쯤 뒤로 가서 벽을 보고 지퍼를 내렸다. 윤도 그의 옆에서 오줌을 누었다.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변 방울이 윤의 발목으로 툭툭 튀었다. 불쾌하다기보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발을 슬금슬금 움직여 윤에게서 떨어졌다. 남자는 불쾌했을까, 비참했을까. 각자 바지를 여미며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너도 지금 싸.
남자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이는 요의가 없었지만 아빠 말대로 했다. 오줌 두어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고서 얼른 옷을 추켜 입었다.
모두가 볼일을 다 본지 한참 됐는데도 여자는 남자와 거리를 둔 채로 움직였다. 서로 간신히 기척만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누군가 여자에게, 왜 남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 걷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자는, 딸이 어려서 빨리 걸을 수가 없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여자와 남자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붙어 걷지 않는 이유는 제 가방을 메고 싶지 않아서다. 남편에게 기대 인생을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게 여자가 남자와 결혼한 이유였다. 아내의 행복은 곧 남편의 행복이기도 하니 남편에게 기댄다기보다 남편과 함께 인생을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결혼의 이유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적어도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이 이 꼴이 된 후 행복은 이미 죽은 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지금 여자에게는 자기가 짊어지고 걸어야 할 가방의 무게를 남편에게 전가하는 게 그나마의 편함이었다.
일곱 번째 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서로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로에서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두세 명이 짝을 이뤄서 한 사람을 올려주고 먼저 올라간 사람이 뒤이어 오르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 오래 쉬거나 잠을 잘 때는 선로보다 플랫폼이 낫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자고 갈 생각입니다.
남자가 윤에게 말하며 여자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짜증이 섞인 움직임이다. 여자가 도착하자 남자는 두 팔을 뻗고 발을 구르더니 능숙하게 위로 올랐다. 여자는 남자가 끌고 다니던 여행용 트렁크를 힘겹게 안아서 위로 들었다. 가느다란 몸이 휘청거렸다. 윤이 재빨리 트렁크를 잡고 그것을 남자에게 건넸다. 아이 둘을 안아 올릴 때도 윤이 도왔다. 작고 가벼운 아이들은 차례로 윤의 손에 번쩍 들려 남자의 손으로 옮겨졌다. 여자는 윤이 짐과 애들을 하나씩 들어 올릴 때마다 고맙다고 인사했다. 여자가 오르는 걸 도울 때 윤은 무릎을 구부려 자기 허벅지를 밟고 오를 수 있게 했다.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여자의 발이 윤의 허벅지를 짓이기며 흔들렸다. 남자는 아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선로에 남은 건 윤뿐이었다. 조금 더 걸을까. 체력은 남아 있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 득일지 해일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섰다.
- 아저씨.
윤이 올려준 열 살 남자아이가 윤을 불렀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가슴이 허벅지에 붙도록 몸을 접은 채 윤 쪽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아이 아빠와 엄마는 짐을 끌고 잠 잘 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중이다.
제가 잡아줄게요. 아이가 소리 내어 말한 건 아니지만 내밀어진 작은 손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 손을 잡고 힘을 주면 윤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아이가 떨어질 것이다. 아이는 아직 그런 계산을 할 줄 몰랐다.
윤은 팔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고 살며시 흔들었다.
- 고마워. 근데 아저씨는 혼자 올라갈 수 있어.
아이의 손을 놓고 윤은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아이는 윤이 먼저 올려둔 가방을 작은 손으로 꼭 쥐어 지켰다. 윤과 아이는 같이 일어났다.
남자와 여자는 자리를 잡고 짐을 풀고 있었다. 두 면이 벽이고 벤치가 있고 전등도 아직 나가지 않은 좋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족은 한때 부유했다.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 지금은 부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 한때는 분명 그러했음을 지금도 알 수는 있었다. 어른 둘과 아이 둘의 때 탄 옷과 신발이 모두 고급품이고, 여자의 목걸이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이불처럼 쓰려고 펼친 스카프 역시 명품이다. 윤은 그런 것들을 이제 알아보았다. 선로에서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그러나 윤의 눈길을 끈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여행용 트렁크 안에 차곡차곡 담긴 물병과 통조림. 열흘이나 걸었다면서 아직도 저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니, 윤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여자는 윤의 시선을 보고는 얼른 트렁크를 닫아 잠갔다.
- 이쪽에 자리 펴도 됩니다.
남자는 윤에게 자기 자리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공간이 모두 자기 것인데 너에게 특별히 사용을 허락하겠다는 태도라 윤은 굳이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구석 자리는 이미 누군가 다 차지했고 전혀 모르는 사람 옆으로 가 눕기도 싫었다. 윤은 남자가 손짓한 곳에 얇은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앉아서 뻐근한 어깨와 다리를 주물렀다.
이내 계단 앞에 성인 남자들이 모여 섰다. 아이의 아빠가 계단 한 칸 위에서 다른 다섯 명의 남자들을 아우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 아빠는 가장 큰 칼을, 계단 아래 세 사람은 과도 수준의 칼을 한 자루씩 들었다. 리더 격인 남자 손에 들린 칼은 날렵하게 잘 갈린 회칼이었다. 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칼을 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거부감과 경계심도 솟았다. 아이 아빠가 윤 쪽으로 고갯짓을 하자 나머지 남자들이 모두 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윤은 흘깃대던 눈동자를 거두고, 모르는 척 그들을 등진 채 누웠다. 합류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끼지 않기로 했다. 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걷는 일에 굳이 연대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은 에너지 낭비다. 내일부터는 혼자 걸으리라, 윤은 다짐했다.
남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윤은 슬그머니 다시 일어나 앉았다. 허기지다 못해 장이 꼬인 듯 아파오는 배에 먹을 것을 넣어야 했다. 윤은 배급받은 에너지바를 하나 까서 씹었다. 뜨뜻미지근 물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천천히 삼켰다. 물은 사막처럼 메마른 혀와 목, 식도와 내장을 타고 내려가다가 점점 사라져 버렸다. 냉수를 마음껏 들이켰던 적이 언제였던가. 모든 계절을 점령하고 모든 생명을 바싹 말려버린 더위는 시간마저도 엿가락처럼 늘려버렸다. 불과 이삼 년 전이 전생처럼 아득했다. 윤은 다시 바닥에 몸을 누였다. 머리카락과 몸뚱이에서 쉰내가 났다. 불안만큼 커다란 피로가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윤은 몸이 말라 쪼그라들고 뼈가 녹아 없어져서 결국 한 무더기의 똥만 남는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