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율 Aug 31. 2024

선로를 걷다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화

자정이 되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도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비상계단을 오르는 줄이 이미 길었다. 지하 7층에서 1층까지 사람들은 어둑한 계단을 힘없이 올랐다. 로비에서 일주일치 식량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다시 뒤로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느린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불량품들 같았다. 과자 부스러기를 이고 나르는 늙은 개미의 행진 같기도 했다.


윤은 받은 음식을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식량을 나눠주던 사람이 윤을 흘긋 쳐다봤다. 뒷사람 두엇이 윤의 배낭을 툭툭 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안 갑니까? 다 받았으면 얼른 내려가쇼.


윤은 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짜증 내던 사람들은 잠깐 흠칫했다. 그리고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찼다. 저 사람 저거, 후회할 텐데. 윤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며칠 못 가 죽을지도 몰라, 여기 그냥 있는 게 나을 거야. 다리를 잡아끄는 상념들을 애써 누르고 윤은 바깥으로 걸어갔다.


- 이 건물을 떠나는 겁니까?


출입구에 선 군복 차림의 남자가 윤에게 물었다.


- …네.


남자는 윤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윤은 본인 이름 옆에 서명을 했다. 남자는 이곳 주소 옆에 적힌 숫자 179를 178로 고쳤다. 윤은 이제 이곳에서 식량을 받을 수 없다.


가로등 불 하나 없는 거리는 캄캄했다. 윤은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길을 걸었다. 낮 동안 달궈진 아스팔트는 여전히 뜨겁다. 열기를 다 내보내기 전에 태양이 또 떠오를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견디기 어려운 날이 될 것이다.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살 썩는 내가 났다. 군용 트럭 한 대가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 너덧 구를 수거하고 있었다.


윤은 땀에 절어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아래로 내려가자 비로소 지글거리는 열기가 가셨다. 그래도 공기는 덥고 불쾌했다. 옅은 지린내가 진동했다. 윤은 플랫폼까지 가서 벤치 위에 배낭을 내려놨다. 셔츠를 벗어서 비틀자 땀이 짜여 나왔다. 흐릿하게 켜진 전등이 윤의 머리 위에서 지지직 소리를 냈다. 웃통을 벗은 채로 다시 배낭을 멨다. 바닥에 퍼져 있거나 선로를 걷는 사람들도 윤과 비슷한 차림새다. 50도를 넘는 기온에서 옷으로 차리는 품위나 예의는 사치에 불과하다.


윤은 플랫폼에서 지하철 선로로 내려갔다. 보기보다 깊었다. 까맣게 난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발목을 잡기 전에 걸어야 했다.


- 오늘 처음 걷나 봅니다?


거대한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굽이진 지하 선로를 걸은 지 한 시간쯤 됐을 때였다. 앞서 걷는 사람들을 하나씩 뒤로 하고 나아가는 윤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 그렇게 가다가는 금방 지칠 수 있어요.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돼.


윤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 우린 지금 한 열흘째 걷고 있어요. 앞뒤로 스무 명 정도가 같이 움직이는 무립니다. 우리도 처음엔 각자 걸었지. 근데 같이 걷는 게 좋아요. 무리하지 않고 일정한 페이스로 걸을 수 있거든. 외롭지도 않고.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윤에게 내밀었다. 목이 몹시 말랐지만 윤은 선뜻 물병을 받지 않았다. 낯선 남자의 호의는 의심스러웠다. 남자는 자기가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물병을 윤 쪽으로 건넸다.


- 다 마셔요. 나도 처음 걸을 때 누가 이렇게 도와줘서 아직까지 걷고 있는 거요.

-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윤은 목을 젖혀서 얼마 안 남은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물이 닿는 순간 잠시 해소되나 싶던 갈증이 이내 더 많은 물을 요구하며 윤을 괴롭혔다.


- 여긴 제 처와 아이들입니다.


남자가 손전등을 든 손으로 뒤를 잠깐 비추며 말했다. 윤은 빛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묵례했다. 여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기계처럼 계속 걷던 대로 걸을 뿐이었다. 짐을 지고 두 다리를 움직이는 일만으로도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있어서 그럴 거라고 윤은 이해했다. 여자의 양옆에서 걷는 아이 둘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얻어먹은 대가랄까, 윤은 남자와 한동안 나란히 걸었다. 고작 열흘이지만 지하 피난길을 먼저 오른 남자는 윤에게 여러 조언을 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걷는 건 무리다, 잠은 열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이 좋다, 가장 북쪽에 있는 종착역까지는 이 주에서 삼 주 정도 걸릴 거다, 물과 음식은 아껴서 먹되 탈수증을 조심하라, 선로에 쓰러진 사람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기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최선이다……. 윤은 그의 말을 적당히 새겨들었다. 딱히 새롭거나 유용하지는 않았으나, 유념할 내용이라고 여겼다. 바깥은 한낮 기온이 65도를 넘었다는 소식과 이제는 더 이상 세지 않는 사망자의 수가 삼천만에 달한다는 소문을 답례처럼 들려주었다. 남자는 이미 알고 있다고, 이 세계는 미쳐가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 그래서 이 선로로 어디까지 걸을 생각입니까?


남자가 윤에게 물었다.


- 내목역까지 갈 겁니다.

- 내목역? 거기 새로운 대피소라도 생겼습니까?

-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윤은 고향으로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5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시골집이 윤의 목적지다. 지하철로 두 시간, 내목역에서 버스로 또 한 시간, 시골 정류소에 내려서 삼십 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이다. 도시의 모든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금은 걸을 수밖에 없다. 지하 선로를 걷는 데에 닷새, 태양을 피해서 산길을 따라 걷는 데에 일주일 정도 걸리리라고 윤은 예상하고 있다.


- 대피소도 없는데 내목역은 왜 가요? 무작정 밖으로 나가면 타 죽기밖에 더 합니까?


남자가 궁금한 듯 다시 캐물었다.


- 거기서 산 타고 더 걸어서 고향집에 가려고요.

- 아… 산에서 연명하는 무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햇빛도 가려지고 풀이나 열매도 있을 테니 살 수도 있겠네요. 집은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남자는 흥미를 잃은 듯 말끝을 흐리며 대강 대꾸했다. 넌 얼마 못 가 죽겠구나, 차라리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매주 배급되는 밥이나 받아먹지, 어리석은 자로군. 이런 뜻이 내포된 말투였다.


- 그쪽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 최북단 종착역까지 갑니다. 거기 대피소가 그나마 살만하다고 합디다. 살아서 도착할 수만 있다면 이 고생을 하는 보람이 있겠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산이나 고향보다는 대피소를 찾아가는 걸 추천합니다. 지금 밖에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 여보.


그가 말하는 도중에 여자가 남자를 불러 세웠다.


- 잠깐 가방 좀 들어줘요.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전등을 돌려 비추며 답했다.


- 왜?

- 아빠, 나 똥 마려워.


여섯 살 딸아이가 두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골을 누르고 몸을 비틀며 칭얼댔다. 열 살 남자아이가 여동생의 백팩을 앞으로 둘러메고 있었고, 여자는 자기 가방을 남자에게 주고 남자에게서 손전등을 건네받았다. 여자아이는 선로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두 팔로는 앞에 선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아빠와 아들은 윤의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먼저 걷던 이들이 싼 묵은 배설물 냄새에 아이가 갓 눈 똥냄새가 섞여 들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얕게 호흡하며 묵묵히 걸었다. 더위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때에 냄새 따위로 불평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게다가 악취의 주원인인 땀과 오줌과 똥은 인간의 몸속에서 몸 밖으로 나오는 물질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향긋한 걸 – 이를테면 곡식이나 과일 같은 것 – 먹어 없애고, 더럽고 구린내 나는 걸 – 이를테면 땀과 똥과 오줌 같은 것 – 배설해서 내놓는 존재일 뿐인가. 윤은 탐스럽고 상큼한 사과 한 알을 상상했다.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이걸 먹는다면 적어도 이 사과 하나만큼은 가치 있는 뭔가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더위 먹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겨우 먹고 겨우 살았다.


열기를 피해 지하에 숨어들어 먹고 자고 땀 흘리고 볼일 보고 한숨 쉬고 더워하고 죽어가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니까. 군인들은 음식을 배급하고 시체를 치우는 일을 했지만, 그것이 먹고 자고 땀 흘리고 볼일 보고 한숨 쉬고 더워하고 죽어가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다지 가치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어땠더라. 그리 다르지 않았었다고, 윤은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