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율 Oct 02. 2024

두 얼굴의 여자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1화

윤은 곁에 선 선우의 어깨를 끌어당겨 본인의 몸 뒤쪽으로 숨겼다. 선우 손에 들린 손전등도 자신이 받아 쥐었다. 흐릿한 빛 끝에 보이는 여자가 몹시도 기이다. 분명히 한 사람인데 두 명이 반반씩 겹쳐진 것 같았다. 총을 쥔 오른쪽은 무심하고 잔혹한 킬러의 모습이고, 우는 아이를 품에 안은 왼쪽은 여리고 걱정 많은 엄마의 모습이다. 아픈 다리를 신경쓸 여력도 없이 겨누어진 총구 앞에서 윤은 숨을 죽였다.1분, 아니 10초 흘렀을까. 울고 있는 아기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한번 말했다.


- 들어오면 정말 쏠 겁니다. 여기서 나가세요.  


뒤에서 선우가 윤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윤도 선우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밀착시켰다. 나무창이 박힌 오른쪽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총구 쪽으로 걸어갈 수도 없지만,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다. 비유가 아닌 말뜻 그대로 진퇴양난, 딱 그 상황인 셈이다. 윤은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이 아닌, 동전 세로로 서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총을 든 여자에게 말을 꺼냈다.


- 더… 더 들어가지 않을게요. 여기, 지금 서 있는 딱 여기서 태양만 피할 수 있게 해주세요. 어차피 지금 밖으로 나가면 저희는 죽습니다.


총구가 겨누어진 주제에 해줄 것은 없이 받을 것만 요구하는 협상은 대개 통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죽을 바에는 아무리 가느다란 가능성이라도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킬러에게는 안 먹힐지 몰라도 아이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을까. 여자는 윤의 간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숨 넘어갈 듯한 아기 울음소리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윤은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 정말 한 발자국도 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바로 나가겠습니다. 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있어요.


여자는 고심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안전하고 쉬운 선택이다. 그러나 돌 된 아기를 안고 총을 쏘고 싶지는 않았다. 신중해야 했다.


- 손전등을 돌려서 본인 얼굴을 비추세요.


윤은 시키는 대로 했다. 눈이 부셔서 손전등 팔을 몸에서 멀리 뻗다가 살짝 균형을 잃을 뻔했다. 선우가 잡아주지 않았으면 넘어졌을 것이다.


- 뒤에 선 사람 얼굴도 비추세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여자의 말을 따랐다. 선우는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피하거나 숨지 않고 얼굴을 보였다.


다리를 다친 남자와 어린 소년. 큰 위험이 되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다. 여자는 선우가 손전등을 들고 세 걸음 앞으로 걸어와 불빛이 그들을 향하도록 땅에 내려놓고, 다시 윤의 곁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제 여자는 동굴의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혔고, 윤과 선우의 발치 쪽으로 전등 빛이 비쳤다.


- 딱 오늘 낮 동안입니다. 밤이 되면 바로 나가세요. 중간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려고 하면 바로 쏠 거예요.

 

윤은 고맙다고 웅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앉는 데에도 선우의 부축이 필요했다. 여자도 그제야 총을 내려놓고 두 팔로 아이를 안고 얼렀다. 숨이 차도록 울던 아기가 점차 소리를 줄이고 진정했다. 양쪽 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괴이하고도 불안한 한낮의 동거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윤이 한 일은 다리 상처를 살피는 것이었다. 선우가 여분의 손전등을 윤의 오른쪽 다리에 비추고, 윤은 이를 꽉 깨물고 박힌 나무창을 빼냈다. 다행히 뼈나 힘줄의 손상 없이 살만 파인 듯했지만, 뜨끈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윤의 잇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보다 조금 더 큰 선우의 훌쩍거림이 동굴에 울렸다.


여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동굴 입구에 설치한 덫이 실제로 사용된 건 처음이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설치했지만, 가능하면 사람이 아니라 토끼 같은 사냥감이 걸리기를 바랐다. 만약에라도 사람이 걸린다면 걷지 못하거나 아예 죽어버려서 동굴에 절대 들어올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자의 바람은 번번이 그렇듯 이번에도 모두 빗나갔다. 남자의 상처에는 죄책감이 들지 않았으나 소년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바람만이 아닌 행동으로 도울 수 있었다.


- 이거 쓰세요.


여자가 던진 물건이 손전등 뒤로 툭 떨어졌다. 선우가 벌떡 일어나 전등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물건을 주워 윤에게로 돌아왔다. 열 걸음 정도 오간 짧은 시간 동안 윤은 총성이 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선우가 가져온 건 붕대와 생리식염수였다.


- 고맙습니다.

- 상처를 세게 눌러 지혈을 하고, 피가 어느 정도 멈추면 세척을 하세요. 그러고 나서 붕대를 단단히 감는 게 좋을 거예요.

- …고맙습니다.


젖을 다 먹은 아기가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다. 여자는 아기의 등을 쓸며, 윤과 선우의 어설픈 치료를 주시했다. 수일 내 고열이 난다면 파상풍일 거라고, 그럼 당신은 아마 죽을 거라고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사람들이었다.


가까스로 붕대를 다 감으니 윤과 선우의 뱃속에 허기가 몰려왔다. 아슬아슬히 죽음을 앞두고도 배고픈 감각은 물러설 줄 모르고 정직하게 찾아왔다. 잠시 보류했던 만큼 더 크게 덮쳐왔다. 둘은 각자 제 가방에서 에너지바와 젤리를 꺼냈다. 서로 말을 한 건 아니었는데도, 둘은 음식을 3개씩 꺼냈다. 병도 주고 약도 준, 어찌됐든 지금 이 시공간을 함께하고 있는 저 빛 건너편 여자를 위한 하나씩의 마음이었다.


- 저, 이거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에너지바랑 젤리입니다. 적당히 한 끼 때우기는 괜찮을 거예요. 그쪽으로 던져도 될까요?


동굴 안쪽 어둠 속에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기를 다독이는 가만한 손짓만이 여자가 윤의 말을 듣고 있다는 표시처럼 들려왔다. 윤은 여자가 볼 수 있게 음식을 빛 쪽에 가져다 댔다.


- 저희도 지금 하나씩 먹을 건데요. ……괜찮으시면, 던지겠습니다.


에너지바와 젤리가 차례로 여자의 무릎 앞에 떨어졌다. 여자는 어느새 잠든 아이를 곁에 눕히고,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다. 윤은 작고 둥근 불빛 속에 나타난 여자의 모습을 티 나지 않게 훔쳐봤다. 피로하고 찌든 기색이지만 앳되고 단정한 얼굴이다. 여자는 조용히 음식을 집어 들고는 마치 이런 물건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한참 동안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윤과 선우가 다 먹고 슬쩍 자리에 누울 때쯤에야 여자는 에너지바의 껍질을 까고, 한 입 베어 천천히 꼭꼭 씹었다. 그 딱딱한 에너지바가 즙이 될 정도로 오래 저작운동을 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한 입의 음식인냥 입 속에 오래 머금었다. 윤은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자신에게 덫을 놓고 총을 겨눈 상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야위고 슬퍼 보였다. 여자는 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후, 입김을 불어 촛불을 껐다. 한동안 동굴에 적막이 고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기가 새근새근 자는 소리와 선우가 도로롱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적막을 얇게 거뒀다. 윤은 내내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않았다. 그리고 기다리던 소리를 포착했다. 에너지바의 포장지가 부스럭거리고, 조용히 다시 한 입 베어무는 소리, 녹여먹을 듯 아주 천천히 그것을 씹는 소리. 여자가 에너지바를 다 먹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후, 윤이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저기…… 저희가 밤이 되면 여기서 나갈 건데요. 보시다시피 다리도 다쳤고, 잠도 부족해서 멀리는 못 갈 거 같습니다. 혹시, 근처에 이런 동굴이나 하루이틀 해를 피해 머물 만한 곳이 있을까요?


여자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 … 어디서 오신 거죠?

-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지하철 선로를 따라 내목역까지 걸어왔고, 며칠 전에 이 산에 들어왔어요.

- 옆의 아이는 아들인가요?

- 아뇨. 선로를 걷다가 만났는데…… 애 부모가 다 떠나서 저와 같이 걷게 됐네요.

- 그럼 아이를 왜 데리고 다니시는 거죠?


윤은 그 물음에 뭐라 답해야 할지 스스로도 잘 정리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여자가 되물었다.


- 비상식량?

- …네?


여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윤은 '비상식량'의 의미를 생각해 보다가 흠칫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 아… 아뇨, 무슨 그런 소릴…….

- 오늘은 네 아이를 잡아먹자, 그리고 내일은 내 아이를 먹자. 여긴 이미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인 걸요. 물론 죽는 건 결국 약자의 아이와 약자들이지만.


잠든 선우나 여자 곁의 아기가 이 말을 들을까 봐 윤은 퍽 당혹스러웠다. 엄마가 아니라 그냥 킬러였던 걸까.


- 이 근처에 작은 바위굴은 몇 개 있지만 동굴은 이거 하나예요. 차라리 여기서 떠나 옆산으로 가세요. 거기가 먹을 것이나 잘만한 곳을 찾기 좋을 겁니다. 여기 있던 사람들도 다 그리로 갔어요. 헤매지 않고 간다면 하루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어요.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윤도 조용히 돌아누웠다. 동굴에 머물게 해주고 붕대를 던져준 여자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선우를 비상식량으로 보는 여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방아쇠가 언제 당겨질지 모르는 약자의 위치에서 윤은 아픈 다리를 끌어안고 해가 다 지도록 잠들지 못했다.




이전 10화 당신은 누구이기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