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서정시인(1911) &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서정시인 (The Lyricist)
- 작가 : 에곤 실레 (Egon Schiele)
- 제작시기 : 1911년
- 전시장소 : 비엔나 레오폴트 미술관
여행자 사이에 회자되는 말로 "클림트를 보려고 비엔나에 갔다가 실레에게 반해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비엔나는 곧 <키스>로 대표되는 클림트의 미술 세계이지만, 클림트의 제자인 에곤 실레의 미술 세계이기도 하다. 작품 중 유독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분출하는 인물화가 많고,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도 많은 화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림으로 세상과 대화한 화가, 에곤 실레는 "불안한 청춘의 심볼"과도 같다.
에곤 실레가 삐딱하게 앉아있다. 몹시 할 말이 많아보이는 그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구체관절인형 수준으로 삐딱하게 비틀린 그의 포즈, 그리고 캔버스에 살짝 드러난 그의 노출이 보인다.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놓고 삐딱하다 못해 비틀린 포즈로 세상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으로 쏘아본다. 이토록 '아우라' 자체로 청춘의 반항심을 드러내는 이가 인류 역사상 에곤 실레와 제임스 딘 말고 또 있었나 싶다.
그런데 실레는 이 작품의 제목을 <서정시인>이라고 붙였다. 요즘 표현으로는 작사가라고 해도 된다. 그냥 문학가가 아니라 노랫말 같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젊은 래퍼와 같은 포지션 아닐까? 대중에게는 낯선 방식, 그러나 확고한 자기만의 방식, 그 속에 담긴 명징한 자아,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는 자신의 '아우라'를 <서정시인>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날이 잔뜩 선 거친 그림은 당시에도 주목 받고 사랑 받았다고 한다. 클림트가 자신보다 낫다고 극찬했을 정도로 에곤 실레는 그림의 기본기가 이미 완성된 화가였다. 그 실력으로 세상에 없는 그림을 그렸으니, 게다가 누구 것을 베끼지 않고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했으니, 심지어 그 모델로 자기 자신을 내세웠으니, 과연 누가 그의 그림을 탓할 수 있을까.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고 세상을 도발하는 거친 화가의 결기를 보며 속사포 랩이 쏟아지는 듯하다.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은데 수다나 넋두리가 아니라 예술로 말하겠다는 에곤 실레, 그는 '서정시인'이 분명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Chinese Lantern Plant)
- 작가 : 에곤 실레 (Egon Schiele)
- 제작시기 : 1912년
- 전시장소 : 비엔나 레오폴트 미술관
사건이 터졌다. 날 것 그대로의 본능적 감정에 충실한 에곤 실레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의 본능적인 성(性)에 심취했고, 빈민가 미성년 여성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렸다. 이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고 경찰이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100점이 넘는 노골적인 여성 누드화를 발견했다고 했을 정도다. 다수의 자료에서 그 수위가 포르노그래피 수준이라 표현하고 있다.
아동학대 및 유괴 혐의로 기소된 그는, 유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미성년자가 볼 수 있는 곳에 노골적인 누드화를 게시해 정서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3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그의 그림이 법정에서 불태워지는 불명예를 겪게 된다. 법적으로는 경범죄라 할 수 있으나 요즘 관점에서 보면 가볍게 보기 어려운 스캔들이었다.
출소 후 에곤 실레는 조금이나마 날을 감추기 시작했다. 잃을 게 없다는 듯 세상에 덤비던 그가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듯했다. 하지만 그 선 안에서도 여전히 실레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자신만의 화풍으로 거칠고 뾰족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에곤 실레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이 작품,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꽈리열매는 강렬한 빨간색을 발하지만, 열매 자체는 쭈글쭈글하고 말라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열매와 씨앗을 품고 있다. 그래서 당시 예술인들은 꽈리열매를 "육체는 늙고 병들어도 정신은 맑고 선명한 예술혼"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하곤 했다. 실레 역시 꽈리열매를 자신의 뒤에 배치하여 시각적 포인트를 만들어 자화상을 그렸다.
<서정시인>과 비교하면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에서의 에곤 실레는 확실히 한 풀 누그러진 듯하다. 정면을 보지 못하고 측면으로 올려보는데 눈빛도 살짝 불안해보인다. "꼬우면 덤벼"라고 외치는 듯한 기세가 사라진 대신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자아를 잃고 싶지 않은 불안한 정서가 눈빛에 담긴 듯하다. 그 뒤에 걸린 꽈리열매는, 결국 실레가 지금은 과거처럼 당당히 들이받지 못하고 쪼그라든 형편이지만 여전히 그 내면에는 시들지 않은 열정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에곤 실레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힙합 갱스터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 가볍지 않은 스캔들과 불명예, 그 후 누그러진 듯하나 여전히 속은 불타고 있는 이 드라마틱한 서사가 모두 20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그는 "불안한 청춘의 심볼"이다. 자신감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로 불안감에 초조해하는 모든 청춘의 자화상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