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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18. 2018

우리가 처음 선거하던 날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

 

[그래픽 by 꿈공 ]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디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 여운형, '1945년 해방 후 첫 연설 중에서',

서중석 지음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에서 재인용



https://www.youtube.com/watch?v=VhW8QyZmxZ0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현재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선거, 우리나라에서 그 시작은 1948년  5월 10일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나라는 최초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해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그렇게 뽑힌 국회의원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나라의 헌법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제1대 국회의원을 "헌법을 만든다"는 의미의 '제헌의회' 국회의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8명의 제헌의회 국회의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에 따라 최초의 대통령도 선출하고, 최초의 국무위원도 선출해서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정한 나이에 달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자유롭고 평등한 보통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이른바 '5.10 총선거'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최초로 실시된 선거인 '5.10 총선거'는 당시 만 21세 이상의 국민 모두가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각각 1표를 자신이 직접 비밀리에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5.10 총선거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근대적 민주선거의 주요 특징인 보통, 직접,평등, 비밀, 자유 선거의 원칙이 적용된 최초의 선거였습니다.


투표하려면 줄을 서시오~! , 5.10 총선거 하던 날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 '5.10 총선거'는 남북한 모든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되지 못한 반쪽 짜리 선거였습니다. 실제 선거 과정에도 해방 정국의 모든 정치세력이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물리력을 동원한 선거 참여 반대 움직임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김구, 김규식 같은 중도우파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들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고, 좌파 진영은 물리력을 동원해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는 투쟁을 맹렬히 전개했습니다.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세력도 자신들의 지지세력 위주로 선거를 치르기 위해  국민들의 폭넓은 '5.10 총선거' 참여를 독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좌파 세력의 선거참여를 비난하거나 방해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미소 냉전과 좌우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던 해방 이후의 정치상황에 의해서 '5.10 총선거'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남북 분단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선거과정에서 많은 불상사와 혼란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헌의회 선거의 한계와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치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의 손에

다들 아시다시피, 일제 식민지배는 세계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갑작스레 종말을 고했고, 한반도 정세는 강대국들의 전후 처리 문제의 일부로서 우리 민족의 주체적 의지보다는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1945년 해방 전 서구 열강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1945년 2월 얄타 회담,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등 몇 차례 전후 협상에서 한반도 문제의 처리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그 기본 구상은 미국이 제안했는데  38선을 기준으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것과 향후 20~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감격의 기쁨으로 찾아왔지만 불안과 갈등의 폭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얄타회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미국의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



해방정국의 정치적 소용돌이와 갈등의 시작에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한 <동아일보>의 왜곡 혹은 오보가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반도 문제가 최초로 논의된 것은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상 외상 회담이었습니다. 여기서 미국은 자신들의 기존 전후 구상대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제안했고, 이에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수정안을 제출했습니다. 회담 결과 양국의 입장을 절충하여 한반도 문제 해결방안으로 세 가지 방안이 제기되었는데,

첫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수립, 

둘째,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셋째, 최고 5년 기한의 미 영 소 중 4 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위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넷째, 2주 이내 미소공위를 개최할 것이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담과 이에 대한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언론의 왜곡보도, 국론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키다

이렇게 <모스크바 3상회담>의 핵심 내용은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통한 신탁통치의 실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신탁통치안만을 부각해서 보도하면서 심지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자극적인 왜곡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의 성급한 왜곡보도로 국내 여론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탁과 반탁의 극렬한 대립으로 갈라졌습니다.


반탁 시위를 해산하는 기마 경찰대


당시 국내 정치세력을 이념적 지형에 따라 좌에서 우로 정리해 보면, 박헌영 중심의 좌익 공산주의 세력, 여운형 중심의 중도 좌파 사회주의 세력,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민족주의 세력, 이승만 중심의 친미 반공 세력, 한민당 중심의 우익 보수세력 등으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여러 정치세력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이념에 따라 재편되고 분열하기 시작했고 그 갈등의 골은 매우 깊게 파입니다.


 <모스크바 3 상회담>의 결정 사항이 정확히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9일쯤이었고 이에 따르면 신탁통치안을 제기한 쪽은 미국이었고,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조선임시정부와 미소 공위가 협의 하에 실시하도록 되어 있어 국제연합의 신탁통치 방안과는 매우 상이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 36년의 지독한 식민지배를 경험한 조선 민중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신탁통치는 식민지배와 동의어였습니다.  따라서 격렬한 반탁 운동이 전개됩니다. 찬탁이냐 반탁이냐에 따라 정치세력도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이때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가 <모스크바 3 상회담>의 정확한 결정 내용을 소련으로부터 전해받고 찬탁으로 입장을 바꾼 좌익 공산주의 세력은 '하루 아침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한' 민족의 변절자들로 낙인찍히고 '소련의 사주를 받는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반탁 운동과 친일파의 부활

그러나 같은 목소리로 반탁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김구와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중경 임시정부를 한반도의 공식 정부로 추대하기 위해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세력 규합을 위해서, 한민당 측은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세탁하거나 은폐하고 공산주의 진영을 반민족주의자들로 매도하기 위해서 반탁운동을 활용합니다. 즉, 지금까지 반일과 친일의 대립이던 정치구도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이제는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제시대 부역자들과 친일파들은 좌파들의 신탁통치 주장에 극렬 반대하면서 스스로를 민족주의 세력으로 위장하여  애국자로 둔갑시킬 수 있었던 반면, 찬탁의 입장에 기울어진 일제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및 공산주의 세력은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신탁통지 반대 운동과 찬성운동(반탁과 찬탁)


<모스크바 3상 회담>의 신탁통치안이 기존의 국제연합의 신탁통치와는 상이한 것이고 미소공위와 조선임시정부가 협의하여 마련하는 신탁통치 방안이라, 우리 민족이 합심했으면 우리 민족에게 우호적인 단기간의 신탁통치안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가혹한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조선 민중들에게 즉시 독립의 기대는 무엇보다 큰 것이었고 민족 구성원 대다수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는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았고 민족감정에만 충실했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역량 부족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더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한 친일 우익 정치세력의 활약 등으로 반탁 운동은 해방 정국을 뒤흔들었고 민족의 분열과 좌우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왼쪽)와 미군정 대표 하지 중장과 소련대표 스트코프 중장  

   

 미소공위의 개최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개최되지만 반탁운동에 가담한 정당 사회단체를 임시정부 구성에 포함시킬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일종의 타협책으로 미소공위는 "과거의 반탁 행위를 문제삼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모스크바 3 상회담>의 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위에 협력하는 세력은 임시정부 수립시 협의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에 김규식, 여운형, 백남운 등 중도파는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반탁운동은 추후에 하자고 김구, 조소앙, 김창숙 등을 설득했으나 이들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 박헌영 등 공산주의 세력은 반탁 운동에 참가한 세력의 임시정부 가담을 배제할 것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냉전의 격화와 미소공위 결렬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던 미소공위1947년 5월 12일 재개되었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미국은 같은 해 9월, 한국문제를 자신이 주도하는 유엔에 상정해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미소공위의 휴회를 제안합니다. 마침내 10월 21일 소련 대표단이 철수함으로써 미소공위는 최종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를 우리 민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미소공위가 최종적으로 무산된 것은 임시정부에 참여할 정당 사회단체의 범위에 대해 미소와 여러 정치세력 간에 합의가 어려웠던 점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밖에도 이미 이 무렵에 미소 냉전의 격화에 따른 미국의 세계전략이 변화한 것이 무엇보다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동유럽의 공산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마샬 플랜을 발표하며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항하고 전후 유럽의 경제적 부흥을 지원하겠다며 대 소련 봉쇄정책을 천명한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냉전이 격화되고, 국내적으로도 이념 대립이 심화되면서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세력이나 중도세력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급기야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 등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기정 사실화하는 분단 세력의 돌출 발언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미소공위에 소극적인 이승만보다 미소공위에 협조적이던 김규식 등 개혁적 중도우파 세력을 지원하며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던 미군정도 막상 1946년 7월 27일 급진적인 좌우 합작 5원칙이 발표되자 이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미소공위의 최종적인 실패와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도 해체되고 맙니다. 급기야 1947년 7월 19일 미소공위에 협조적이고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중도좌파 지도자 여운형이 암살당합니다. 경찰의 방조 하에 극우 청년에 의해 자행된 여운형 피살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과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의 노력이 최종적으로 좌초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유엔에 의한 한반도 문제 해결

마침내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는 미국의 의도대로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안을 가결했고,  11월 14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하고 이 남북 총선거를 감시할 호주, 캐나다 등 8개국으로 이루어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구성했습니다.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했고 이 시기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은 미소 양군 철수 후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남북협상을 추진합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 선거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에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5월 9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총선거일로 정했는데 이날이 하필 일요일이어서 이후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면서 바로 이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인 '5.10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계획하던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 분단을 기정 사실화할 남한만의 총선거에는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4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남북한 모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냉전의 격화와 이에 따른 미소의 세계전략 변화에 따른 한반도의 분단 정책은 이들 순순한 이상주의자들이 막을 수 없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피할수 없는 남북 분단의 운명

이렇게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 결의에 의해 치러진 '5.10 총선거'는 소련 군정과 북한 정권이 유엔한국감시단의 북한 진입을 허용하지 않아 북한에서는 실시될 수 없었고 결국 남한에서만 치러진 반쪽 짜리 선거가 되었습니다. 김구나 김규식 등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은 '5.10. 총선거'가 남북 분단을 고착화할 것을 우려하여 제헌의회 선거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남한의 좌파세력도 분단정부 수립을 초래할  총선거에 반대하며 총선거 거부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렇듯 '5.10. 총선거' 참가 여부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이 발생해 무고한 양민들이 많은 목숨을 잃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에는 비극의 역사도 숨어 있습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백범 김구, 1948년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울며 고함> 중에서



<5.10 총선거 선거인 증명원>




근대 민주선거의 4대 원칙
헌법 제41조 1항: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
헌법 제67조 1항 :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이렇게 우리 헌법에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국민들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해 선출하도록 되어있는데,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처음에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보통선거라는 것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에서 정한 나이(제헌의회 당시 선거권 연령은 21세, 피선거권은 25세였습니다.)를 먹으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 돈 있는 사람, 남자에게만 선거할 권리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제한없이 선거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보통선거의 원칙입니다.  


평등 선거라는 것은 누구나 1표를 가져야지 누구는 남자라고 10표,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는 5표, 이런 식으로 성별, 지역, 직업 등에 따라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평등선거의 반대를 차등선거라고 합니다. 선거권자 자신이 선거를 직접 해야 한다는 직접선거의 원칙은 다른 사람이 내 투표권을 대신 행사하는 게 아니라 내 표는 내가 직접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투표했는 지는 선거권자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원칙은  바로 비밀 투표의 원칙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사자는 싫은데 선거를 하도록 강요당하거나 어느 후보자를 선택하도록 강제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할 수 었어야 하는 자유 선거의 원칙은 헌법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당연한 것입니다.



<5.10 총선거 투표소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

이런 4가지 원칙이 잘 지켜진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의미의 선거를 우리가 처음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1948년 5월 10일부터였습니다. 이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일정한 나이에 도달한 모든 국민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비밀리에 한 표를 던져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을 만들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5.10 총선거'에 참여했습니다. 이날 선거로 총 198 명의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같은 해 7월 12일 이 제헌의회 의원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도 만들어 7월 17일 공포했습니다(그래서 이날이 헌절).  또 이 제헌의회는 7월 20일 이승만을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즉,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직접선거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뽑은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부통령으로는 이시영을 선출했습니다. 우리나라 이름, 즉 국호에 대해서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조선, 고려, (삼)한 중에서 '대한민국'을 우리나라의 국호로 최종 결정하게 됩니다.


<5.10 총선거 투표소 모습>, 부녀자도 할아버지도 모두 같은 한표, 그런데 투표지를 같이 투입하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인 '제헌의회' 의원들을 뽑기 위한 선거를  '제헌 국회의원 선거' 혹은 '5. 10 총선거'라고 합니다. 이 제헌의회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2년으로 정해졌고, 원래는 200명의 의원들을 뽑기로 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정치적 혼란으로 의원 2명을 뽑지 못해 198명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왜 뽑지 못했을까요? 제주도에서는 이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가담한 무고한 양민들을 국가권력이 무자비하게 탄압한  '4.3 사태'라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주도에서 시행된 선거는 무효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집보고 어머니는 투표장"
"너도나도 한표, 나라가 서는 한표"



5.10 총선거의 한계

이 '5.10. 총선거'는 사실 남북한 전체에서 실시된 선거가 아니라 3.8선 남쪽에서만 실시된 반쪽짜리 선거였습니다. 당시 정치지도자와 국민들 중에는 영구적인 남북 분단을 초래할 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중도 개혁적 정치 지도자이자 민족주의자인 김구나 김규식 같은 분들도 이 선거에 참여하기를 반대했습니다.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박헌영 중심의 좌파 세력들도 이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이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만 실시되면 결국 남과 북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38선으로 사이로 영원히 갈라지고 말 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제주도에서는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고 그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무겁고 혼란한 상황에서 선거 분위기는 다소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의 선거 참여도 저조하고 좌익이 남한 단독 선거 반대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임에 따라 곳곳에서 무력충돌까지 벌어졌습니다. 당시 여론협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인 등록을 한 사람 중에 강요에 의해 등록했다고 말한 사람이 90%에 육박했습니다. 5.10 총선거 당시에는 선거에 참여하려면 스스로가 선거인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과 남한 정부는 선거인 등록을 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표를 주지 않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호대신 작대기를 사용하고 코로나가 아니라 독감 유행으로 마스크를 사용한 투표안내원과 호기심 천국 꼬마!


'중앙정부 수립'을 강조하는 제헌의회 선거 포스터


제헌의회 의원 선거에는 21세의 모든 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할 권리, 즉 선거권을 가졌는데 그 수가 813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은 자나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판임관(判任官) 이상자,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자, 고등경찰이었던 자, 훈(勳) 7등 이상을 받은 자, 중추원의 부의장·고문·참의 등 친일파에게는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선거를 하려는 사람은 미리 선거인 등록을 해야 했는데 등록한 사람이 784만 명이었고 그중에 실제 선거에 참여한 사람은 748만 명으로 95.5%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선거구제는 전국을 200개의 소선거구로 나눠 선거구마다 1명의 의원을 선출하여 200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을 뽑기로 했습니다. 제주도 3개 선거구 중에서 2개 지역 선거가 무효가 되어 총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하게 됩니다.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북한지역을 대표할 의원들 자리 100개도 마련해 놓았지만 이 의석이 실제로 채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선거 결과 74세의 최고령 당선자는 바로 동대문갑에서 당선된 이승만으로 그는 1875년생이었습니다. 최연소 당선자는 경남 봉화 선거구의 배중혁으로 당시 27세였습니다.  일제시대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청천 장군이 서울 성동에서  41,532표를 얻어 최다 득표로 당선자가 되었고, 최소득표 당선자는 2,792표를 얻은 경기 장단의 조중현 당선자였습니다.




선거결과와 제헌의회의 정치지형

이 제헌의회 선거에는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무소속 등 총 948명의 후보가 참여했습니다. 선거결과는 예상밖으로 미군정의 지지를 받던 한민당의 참패로 나타났습니다. 좌익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이 선거에 적극 참여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많은 당선자를 배출한 정치세력은 무소속 계열이었고, 김구 김규식 등의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도 3분의 1 정도의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무소속 당선자는 85인,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55인, 한국민주당은 29인, 이청천 계열의 대동청년단이 12인, 이범석 계열의 조선민족청년단이 6인이었고, 그 밖에 12개의 정당 및 단체가 1~2석을 차지했습니다. 선거에 참여했던 정당이나 단체 중에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한 곳이 31개나 됐습니다.  


제헌의희 의원들


제헌의회의석수, 국회 사이트

그러면 이 제헌의회의 정치세력은 어떤 정치구도를 이루었을까요? 제헌의회는 당시 미군정을 지원을 받는 한민당 세력,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세력, 그리고 김구, 김규식 등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으로 정확히 삼등분되어 있었습니다. 무소속이 가장 많이 당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일제시대 때 힘들게 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들을 좋아했지 일제시대 지주 출신이 대부분인 한민당 쪽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기가 없었던 한민당 소속의 후보자로 등록하지 않고 무소속 후보자로 나와 많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무소속 당선자 중에는 얼마 안 있어 한민당으로 넘어간 후보들이 30~4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헌의회의 세력구도는 정확히 이승만 지지세력, 한민당 지지세력, 민족주의세력으로 3 등분 되어 있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 개혁 세력인 무소속 소장파들은 제헌의회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보수 야당 한민당 세력에 맞서는 비판세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5.10 총선거 투표소 모습>


처음 제헌의회가 헌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처음에는 헌법 초안에도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로 정했는데 대통령 욕심이 컸던 이승만이 의원내각제를 반대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대통령제로 헌법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제헌헌법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함께 뒤섞여 모호한 정체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정당제도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던 이승만은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면 나는 정계에 은퇴하여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며 압박을 가해 결국 대통령제 정부구조의 헌법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 제헌의회 의원 198 명의 투표로 7월 20일 이승만을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고, 초대 부통령에는 김구와 이시영이 경합을 벌이다 결국 이시영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제헌의회는 또한 내각 구성과 각부 요인들 인선에도 착수해 이범석국무총리에, 조봉암농림부 장관에, 국회의장에는 신익희, 대법원장에는 김병로, 법무부 장관에는 이인을 선출하는 등 정부 구성을 마치고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좌: 후보자 선전물,  우: 5.10 총선거에 사용된 목재 투표함>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선거는 비록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치러진 반쪽 선거이기 했지만 일정한 나이(21세)에 달한 모든 국민들이 근대적 의미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에 처음으로 참여할 수 있던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이날을 '유권자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한때는 그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1948년 이렇게 첫걸음을 걷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이후 때론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때론 시련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모든 역경과 위기를 극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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