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한국사회는 여전히 한국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지 못하던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피하기 위해 <발췌개헌>을 통해 무리하가면서 직선제 대통령제 개헌을 이루었고 우여곡절 끝에 재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발췌개헌으로 통과된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2번 밖에 할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기에 장기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번 총선의 목표는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최대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개헌을 추진하여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도입한 것이 바로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정당공천제였습니다.
지난 두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아직 우리나라 정치환경에서 정당제도가 발달하지 못하여 정당의 공천을 받는 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기없는 정당 간판을 달고 나오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아 일단 무소속으로 나왔다가 당선되고 나면 다시 소속 정당으로 복귀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러나 제3회 총선 무렵부터는 자유당을 비롯한 다수의 정당들이 전국적 조직을 정비했고 노동조합 등 막강한 정당 기간조직을 통해 정당이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공무원과 경찰등에 의한 노골적인 관권 선거가 자행되던 이승만 정부시절에는 자유당이라는 집권당 후보로 공천 받을 경우 선거를 치르는 데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3대 총선에서는 많은 후보자들이 자유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자유당은 외형적으로는 지구당-중앙당-총재 순으로 상향식 공천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후보자 공천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은 자유당 총재인 이승만에게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이승만은 당선 될 경우 자신이 추진하는 개헌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후보자들만 공천해 주었습니다.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우리나라 인구수는 총 20,178,641명이었고, 선거인수는 8,446,509명, 투표자수 7,698,390명으로 투표율은 91.1%로 전쟁 직후 혼란기임에도 여전히 매우 높았습니다. 국회의원 선출방식은 선거구마다 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변동없이 소선거구제였습니다. 다만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 210개 선거구 중 이북 7개 선거구를 제외하고 203개 선거구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정당공천제 실시로 무소속 후보자들의 난립이 다소 해소되어 14개 정당만 선거에 참가했습니다. 야당인 자유당은 203개 선거구 중에 184 곳에 후보자를 공천한 반면,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77개 선거구에만 후보자를 공천했습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자로 출마할 경우 쉽게 여권과 정부 당국자의 탄압의 대상이 되고 부정선거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후보자로 나서길 꺼리고 무소속 후보자로 출마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에 실시된 제3대 총선은 강화된 반공 이데올로기와 정부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으로 여당 후보자에게는 유리하고 야당 후보자에게 매우 불리한 선거구도 하에서 치러졌습니다. 야당 후보자의 후보자 등록을 방해하거나 사소한 서류 미비를 이유로 후보자 등록을 취소시키는 일도 많았고 폭력적 수단과 회유를 통해 야당 후보자의 입후보를 사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맞서 싸웠고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국회 부의장까지 지낸 조봉암도 몇차례 서류를 탈취당해 후보자 등록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조봉암은 심지어 부산에서 후보자 등록이 갖은 방해로 어려워 지자 인천과 서대문에서도 동시에 후보자 등록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합니다. 자유당 당원이나 그들이 사주한 폭력배들이 입후보 등록 서류를 가지고 선관위로 오는 야당 후보자 측 선거사무원을 기다리고 있다가 폭행을 가해 서류을 탈취하거나 시비를 걸어 후보자 등록을 방해하는 일도 흔히 일어났습니다.
선거강화(선거계도용 책자)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선거 결과는 여당인 자유당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인 관권 선거,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당인 자유당은 114석(56.2%)을 확보하여 개헌 정족수 136석에는 미달했고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반면 제1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15석(7.4%) 밖에 확보하지 못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무소속은 67명(33%)의 당선자를 냈으나 이전 선거에 비하면 세력이 크게 약화된 것입니다. 이런 선거 결과는 정당 공천체 도입 등 정당정치의 안착으로 인해 무소속 후보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후보자 등록서류 탈취 등 탈법, 부정 선거가 자행된 탓이기도 합니다.
이번 선거는 마치 나중에 있을 부정선거의 예행연습과 같은 양상으로 치러졌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한 상황에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폭력이 쉽게 자행되었고 선거 분위기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 대거 기용으로 권력 상층부와 군, 경찰 등 정부 각계각층에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이 다수 자리를 차지하여 이승만과 정부 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초의 정당 공천제가 시행되었다고 하나 이것 역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할 길을 열어 두었으나 중임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 이후 다시 개헌을 추진하여 영구집권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민의원) 대통령 담화문
자유당 총재인 이승만은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각서를 받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공천장을 발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를 확보하지 못했고 쉽사리 개헌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야당 내 우파세력이 조작한 일명 <뉴델리 밀회 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된 신익희 국회의장이 귀국 길에 인도 뉴델리에서 납북된 조소앙을 만났다고 민국당의 함상훈 선전부장이 폭로한 일입니다. 이 일을 크게 확대하여 마치 야당 의원들이 월북인사들과 내통하여 간첩행위하며 김일성과 이승만을 배제한 영세중립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 부친 것입니다.
이순하 후보자 선전물 도진희 후보자 선전물
1954년 공안정국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자유당은 11월 20일 개헌안을 상정하여 11월 27일에 표결에 붙였으나, 결과는 개헌 정족수에 1표가 모자라는 135표로 부결됩니다. 우습게도 자유당 쪽 국회의원이 개헌안 찬성을 의미하는 한자 '가'(可)를 잘 못써서 무효처리가 되는 바람에 1표가 모자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처음에는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표결 결과에 따라 개헌안 부결을 선포했는데 다음날 경무대의 갈홍기 공보처장이 놀랍고도 경악할 만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수학적으로는 203의 3분의 2는 135.33 일지 모르지만 소수점 이하는 버릴 수 있으므로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135명 찬성이면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결국 자유당은 11월 29일 야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한 가운데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개헌안 부결 번복 가결 동의안'이란 긴 이름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른바 이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이 철폐되고, 국무총리제와 국무위원 연대책임제 철폐되어 우리 정치제도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색채를 띠게 됩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의 기회를 잡은 이승만은 이후 1956년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영구집권을 꿈꿨으나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심복인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자행한 무리한 3.15 부정선거로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당후보자 선전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