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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0. 2018

우리 선거는 우리 힘으로!
자력으로 치른 최초의 총선

1950년 5월 30일 실시 _ 제2대 국회의원선거

1948년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 의해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곧이어 북한에는 9월 9일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됩니다. 이로써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상이한 이념을 추구하는 두 개의 정부가 각각 들어서게 되었고 이후 서로를 부정하는 두 체제 간의 체제 경쟁과 극한 대립은 마침내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반공주의 노선과 무력 북진통일 노선은 남한체제 내에서 이념 갈등과 대립을 격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제주 희생자들



먼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반대하는 제주도민의 평화적인 3.1 절 기념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시민 6명이 사망하며 제주도에서는 광범위한 파업과 항의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청년단체 서북청년회가 이를 진압하면서 보여준 잔인성과 무자비함은 제주도민의 무장봉기를 촉발함으로써 제주도에서는 <4.3.사건>이라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또 이 제주도민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순천의 군인들 일부가 10월 19일 이 진압명령에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이 발생합니다. 


<여순반란 사건>


<4.3사건>과 <여순반란>에 놀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좌익세력 척결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극우반공주의를 확산시키고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를 검거하기 하는데 사용된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계승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사회통제와 반공주의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도구로 활용됩니다.  




반민특위 발족식 기념사진과 습격 당한 특위 사무실


한편,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두가지 최대 민족과제는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이었고 제헌국회는 이 과업을 시행하기 위해  1948년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시켰습니다. 곧이어 10월 23일  <반만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949년 1월 8일부터 본격적이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최남선, 이광수 등 거물급 문화계 친일 인사를 체포하였고,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합니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화 되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의 친일세력들은 끊임없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고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며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구속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과 비호를 등어 업은 친일파들은 민중대회를 열고 국회를 습격했고 마침내 1949년 6월 6일 경찰서장이 병력을 이끌고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에 이릅니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이 습격을 지시했다고 외신기자에게 자랑하듯 밝히기도 합니다. 결국, 정부의 노골적인 방해공작과 경찰 내 친일파의 극렬한 저항으로 반미특위 활동은 중단되었고 이로써 우리 역사에서 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반민특위가 전국에 설치한 투서함



반민특위 활동이 중단되고 1949년 6월부터 이승만 정부의 좌익세력과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숙청이 시작되어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고, 농지개혁에 적극적이고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한 다수의 소장파 국회의원을 남로당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여 제거한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고, 그 폭압의 칼끝에서 6월 26일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가 암살당합니다. 민족통일 노선을 추진한 중도파 민족주의 지도자 김구의 암살로 자신들의 장애물이 제거된 이승만과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유지 정책과 반공주의 노선을 적극 추구해 나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로서 도입한 선거제도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보수주의 정치구조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 냅니다.  1950년 제헌의회는 2년 임기를 마치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 즉, 제헌의회 선거는 사실 미군정 법령 제175호를 근거로 미군정의 관리 하에 시행된 것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우리 국회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으로 치러진 최초의 선거였습니다. 2년 임기의 제헌의회 임기만료가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11월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산안을 심의, 처리해야 하기에 선거를 할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그러나 여론과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거 연기 주장에 반대했고, 미국조차 선거를 연기할 경우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며 정해진 날짜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그래서 다행히 예정대로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1950년 5월 30일 실시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1월, 국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법안을 제출하고, 그해 4월 10일 이를 통과시킵니다. 그리하여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인수 8,434,737명에 투표자수 7,752,076명이 선거에 참여하여 91.9%의 투표율을 기록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총인구는 20,178,641명이었습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도 제헌국회와 마찬가지로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 방식으로 치러졌으나 임기는 2년에서 4년으로, 의석수는 200석에서 210석으로 10석이 늘어났습니다.  또한 제헌의회 선거에서처럼 선거에 참여하려는 선거인이 스스로 선거인명부에 직접 등록하는 선거인 등록제를 폐지하고 시,읍, 면장이 직권으로 선거권자를 조사해 선거인명부를 작성하는 직권 등록제가 시행됩니다. 

이승만 대통령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 후보가 168명 출마하여 가장 많은 후보를 냈고,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에서 151명, 무소속으로는 1,525명이 출마하여 가장 많은 무소속 후보자가 나왔고 이는 후보자 총수의 68.5%에 달했습니다. 총 후보자수는 2,209명으로 경쟁률은 10.5대 1로 매우 높았습니다.  후보자 평균 연령은 45.4세로 상당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최고령 후보자는 78세, 최연소 후보자는 25세였습니다. 참고로 2016년 실시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자 평균 연령은 53세였음을 볼 때 당시 후보자들의 평균 연령은 상당히 낮은 것이었습니다.

 

선거운동은 주로 선전문서와 선거공보를 이용했는데 선전문서는 후보자별로 1회씩 무료로 인쇄할 수 있었고, 선거공보는 선거위원회에서 후보자들의 원고를 제출받아 각 세대에 1매씩 배부했습니다. 합동연설회는 읍면마다 1회로 제한되었으나 개인연설회는 자유로웠습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시간은 오전 7시~오후 5시로 제헌의회 때보다 2시간 줄었습니다.

제2대 국회의원



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5.10 선거에 불참했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출마한 결과 그야말로 무소속의 돌풍이었습니다. 선거 결과 무소속 후보자 126명 당선되어 과반을 넘어 전체 의석의 60%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5.10 총선거에 불참했던 김규식, 조소앙 등 중도파가 대거 선거에 참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산시키는 등 친일파 척결에 미온적이던 이승만 대통령 진영과 친일파 일부가 참여한 민주국민당 등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 심리가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무소속 후보와 중도파의 돌풍이 심상치 않게 감지되자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이들 중도파 무소속 후보들에게 표를 주지말 것을 호소하고, 온갖 방법의 정치공작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하거나 투옥시키고, 이들 후보자들에 대한 근거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흑색선전을 자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불법 선거운동과 탄압을 가했습니다.


정부의 온갖 탄압에도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괄목할 성적을 나타냈습니다. 서울 성북구에서 조소앙은 미군정 경찰계의 거물 조병옥을 압도적인 표차이로 눌러 이겼고, 부산에서는 장건상이 옥중에서 당선되는 등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무소속 당선자가 126명이었음에 반해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은 24석을, 보수야당인 민주국민당도 24석을 얻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 될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이후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제2대 국회는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조봉암과 장택상을 선출합니다. 중도파 민족주의 지도자인 조소앙은 3만 4천여 표를 받아 이번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자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가하고 우리가 제정한 최초의 선거법에 의해 우리 힘으로 실시한 선거로 구성된 제2대 국회, 극우 반공주의 노선의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의 다수 당선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던 제2대 국회는 그러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 채 한 달도 못돼 좌초하고 맙니다.  선거가 끝난지 채 한달도 못된 1950년 6월 25일, 민족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발발로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 많은 중도파 의원들이 납북되고 이어진 정치적 혼란에 2대 국회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국회부의장 조봉암은 진보세력으로 등장해 이승만 정부의 독단과 극우 반공주의를 견제했습니다만,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할 중요한 기회는 너무 짧게 사라지고 전쟁이후 남북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우리 민주주의도 거센 시련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당선사례문
전단형 선전물(좌)와 명함형 선전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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