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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0. 2018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선거

1952년 8월 5일 실시 _ 제2대 대통령선거




1948년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한 지 어언 4년이 지난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져 이승만이 당선됩니다. 바로 이 제2대 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선거였습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중도좌파와 민족주의 진영의 후보자들이 대거 당선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는 자신의 대통령직 재선이 어렵다는 점을 알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직선제 대통령제를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아니러니하게도 이때는 이승만이 자신의 권력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대통령 직선세가 이후 오랜동안 우리 역사에서는 민주주의 진영의 목표가 됩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국회보다는 국민들의 직접적인 신임여부를 묻기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지만 다른 대통령들은 대통령 직선제로 표출되는 국민적 열망과 민주화 요구가 두려워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1952년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제헌의회 헌법에 규정된 간선제 대통령제가 어떻게 2년 만에 직선제로 바뀌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정치지형의 흐름을 살펴 보아야합니다. 1950년 5월에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는 5. 10 총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던 김규식, 조소앙 등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과 중도 좌파 진영이 대거 선거에 참여해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국회의 정치구도가 정부 여당보다 야당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게되어 이들이 국회에서 이승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활동하게 되자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한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은 매우 불확실해졌습니다.

민족사의 비극 한국전쟁


또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거듭된 실정은 국회와 이승만 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을 더욱 키웠습니다. 새로운 국회가 선출된지 한달도 채 안 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 되었습니다. 전쟁 직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27일 오전 8시에 소집된 비상 국회에서는 "오늘 중으로 북한군을 격퇴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다"는 근거없는 희망사항을 보고해 이에 고무된 국회가 서울 사수를 결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열차로  혼자서 서울을 탈출해 피신합니다. 다음날 한강 다리마저 폭파되어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고립되었고 이들 중 안재홍, 조소앙 등 일부 국회의원들은 강제 납북되었습니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의 몰지각한 행태는 국회의 거센 반발과 비난을 불러 왔고, <거창 양민학살>처럼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곳곳에서 자행된 무고한 민간인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정부의 실정은 국회와 정부의 갈등과 정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 등으로 민심이 크게 이탈하자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김성수가 부통령에 취임합니다.

서울로 진격한 북한군 탱크



제헌헌법에 따르면 4년 임기의 초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1952년에는 국회에서 새로 2대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하여 입지가 좁아지고 한국전쟁 동안 국회와 갈등이 깊어진 이승만 정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제2대 대선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선 자신을 지지할 정당을 창당, 육성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1951년 12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을 기반으로 자유당(원외 자유당)을 창당합니다. 당시 국회에는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주장하는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결성되었는데 이승만은 이와 별도로 자신의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원 양원제 개헌안을 지지해줄 원외 자유당을 창당한 것입니다. 이승만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반대 143표 대 찬성 19표로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노림수였습니다. 노회한 정치인인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국회의 권력지형 하에서 자신의 개헌안이 통과되지 못하리란 것을 예상 못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회를 비난하며 개헌안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해야 하다는 초헌법적인 담화까지 발표하며 지지자들을 부추깁니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민의인데 국회의원이 민의를 무시한다며  국회의원을 국민들이 소환해야 한다는 소환 시위가 부산의 국회 의사당 앞과 전국에서 벌어집니다.  당시 국회는 오히려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4월 17일 국회의원 123명은 정식으로 내각책임제를 규정한 국회의 개헌안을 제출합니다. 그러자 또 다시 전국은 내각 책임제 개헌안에 찬성하는 국회의원 소환운동과 규탄 시위가 벌어집니다


부산 피난민촌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느닷없이 오랫동안 연기해 왔던 지방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된 지방선거가 바로 1952년 4월 25일의 시읍면 의원 선거와 5월 10일 실시된 도의원 선거이니다. 전쟁 중이라 전국에서 지방선거를 실시할 형편이 아니었고 서울, 경기, 강원을 제외하고 시읍면의회의원 선거, 도의회의원선거가 치러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신의 한수였습니다.전시하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정부당국과 공무원의 선거개입은 노골적으로 자행되었고 그 결과 주로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 후보자들의 대거 당선되었고, 이들은 국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심지어 '국회원만 민의를 대변하냐, 우리도 민의를 대변한다"며 헌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거리에서 시위를 하거나 벽보를 붙이며 국회를 협박하는 관제 여론부대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합니다.



직선제개헌을 요구하며 국회의원소환과 국회해산 시위를 벌이는 지방의원들

 

이런 상황에서 1952년 4월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의 개헌안이 제출되고, 5월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정부의 개헌안이 제출됩니다. 당시는 한국전쟁 당시라 부산이 임시수도였고, 국회도 부산에 있었는데, 1952년 5월 24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하고 다음날 부산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 다음날 국회로 출근하는 국회의원들을 태운 출근버스를 헌병대가 크레인으로 끌고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입니다. 국회의원을 버스째로 끌고가는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헌병과 관제 데모대가 국회를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과 체포의 공포로 몰아넣은 억압적인 상황에서 6월 21일 정부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제출합니다. 이는 국회의 개헌안과 정부의 개헌안을 절충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통령직선제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50여명을 체포하고 10명의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당시 처음 실시된 지방의회선거에서 당선된 지방의원들을 동원해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반해하는 국회해산운동을 벌이는 등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하기 위해 갖은 책동을 벌입니다. 


국회통근버스를 검색하는 헌병, 부산정치 파동

 도의원 선거가 끝난 이틀 뒤인 5월 14일 정부는 정부 대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의결, 공고하여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국회와 정부는 내각 책임자냐 대통령직선제냐 하는 개헌안을 사이에 놓고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최초로 실시되 지방선거를 통해 구성된 지방의회 의원들은 대부분 친정부 인사들로 채워져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전쟁 중이라 부산이 임시수도였고, 국회도 부산에 있었는데, 1952년 5월 24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하고 다음날 부산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 다음날 국회로 출근하는 48명의 국회의원들을 태운 출근버스를 헌병대가 크레인으로 끌고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입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계엄군은 대통령직선제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50여명을 구금하고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한 12명의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해 버립니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는 이승만의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국회의원을 버스째로 끌고가는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헌병과 관제 데모대가 국회를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과 체포의 공포로 몰아넣은 억압적인 상황에서 6월 21일 정부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제출합니다. 이는 새로 만든 헌법안이 아니라 국회의 개헌안과 이미 부결된 정부의 개헌안을 절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발췌' 개헌안입니다.

발췌개헌안 통과


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의원 수가 모자르자 간첩이라며 체포했던 국회의원들도 다시 풀어주고 7월 4일 저녁 8시 '발췌 개헌안'을 표결에 붙입니다. 경찰과 군대에 의해 포위된 국회에서 참석한 국회의원 166명이 기립투표 방식으로 표결을 했습니다. 그 결과 발췌 개헌안은 찬선 163표 대  기권 3표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발췌 개헌안은 애초부터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개헌안 공고기간 30일을 지키지도 않은 것이었고,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토의도 없이, 어떠한 이의도 없이 발췌 개헌안을 1시간 반 만에 통과시켰습니다.  참가하여 표결에 참석한 의원들은 기립 표결을 해야 해서 누가 개헌안에 찬성하고 반대하는지 누구나 다 알수 있도록 공개한 노골적인 공개 표결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내각 불신임권, 양원제 국회 운영을 골자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헌이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해 국회를 겁박한 상태에서, 많은 절차상 문제점을 안고 이루어졌습니다.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지 한달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좌: 발췌개헌안 기립표결, 우: 발췌개헌안에 서명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무리하게 헌법을 바꿔가며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지만, 대통령 직선제는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붕괴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는 이승만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4.19. 혁명과 제1공화국의 붕괴입니다.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선거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총유권자 8,259,428명 중에  7,020,684명이 선거에 참여하여  88.1%라는 상당히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후보자로는 자유당의 이승만, 무소속의 조봉암과 민주국민당의 이시영이 야권을 대표해서 출마했고. 한때 이승만과 같은 정치적 동지였던 신흥우도 기호4번으로 나왔습니다. 결과는 이승만이 총5,238,769표를 얻어 74.6%의 득표율로 우리나라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제2대 대통령선거 투표소 풍경, 1952.8.5.
투표함을 나르는 선거관계자들

개헌안이 너무 갑자기 통과되고 후보자 등록 기간이 촉박하여 다른 후보자들은 제대로 선거운동도 할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선거운동 기가은 고작 8일이었습니다. 야권은 분열되어 끝내 조봉암과 이시영의 후보 단일화도 성사되지 못하여 이승만이 무난히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될수 있었습니다. 



같이 실시된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같은 자유당이며 그동안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한 여러 노력을 경주해온 이범석 후보가 아니라 무소속의 함태영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이변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이승만의 선거전략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넘볼 수 있는 2인자를 극도로 경계했던 이승만은 같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 그를 지지하지 않고 암암리에 무소속인 함태영 후보를 부통령으로 지지했던 것입니다. 대통령의 의중이 이범석이 아니라 함태영에게 있음을 알게된 정부 각료들과 당국자들은 노골적인 관권을 동원하여 선거에 개입, 무명에 가까운 함태영 후보자를 부통령에 당선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는 이름도 잘 모르는 초대 감사원장(당시는 심계원) 함태영이 제2대 부통령이 됩니다. 





신익희 후보 선거포스터와 투표하는 이승만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직선제는 이렇듯 숱한 우여곡절 끝에 도입되었습니다. 정치발전을 위한 고려보다는 집권자의 권력 연장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절차적 타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편법과 불법을 동원한 개헌 절차를 통해 우리 선거 제도에 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대통령 개인의 집권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는 이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주기적으로 직접 국민들로부터 확인해야 하는 민주적 선거제도로 정착했습니다. 그리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권력자들은 오히려 대통령 직선제를 기피하게 되고,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도입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자의 장기 집권을 향한 노골적인 집착과 욕망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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