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4사5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한해 세 번째 출마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정작 자신은 대통령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했으나 이승만은 "한 사람이 세 번이나 대통령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옳지 않다."며 자신은 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민주당 후보자선전물과 선거구호
그러나 이것은 이승만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라 이승만의 전략이자 간계였습니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사사오입 개헌의 반대를 무마하고, 자신은 욕심이 없는데 국민들이 원해서 다시 대통령에 나선다는 모양새를 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상대로 이승만이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하자 각계각층의 조작된 '민의'가 발동했습니다. 이승만의 대통령 출마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각종 어용단체의 진정서와 탄원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전국의 경찰들이 직접 탄원서를 받으러 다니기도 했고 그러다 물에 빠져 죽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심지어는 소나 말을 동원한 대한노총 산하 우마차 조합의 시위도 있었습니다. 국민들만 이승만 대통령의 출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나 말도 원하다는 취지로 우마차에 이승만의 출마를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하는 통에 서울거리가 소똥 말똥으로 똥바다가 되었습니다. 결국 3월 23일 이승만은 '민의를 수용하여' 대통령 출마를 선언합니다.
이승만 후보추대 시위와 진정서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정, 부통령 선거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수는 21,526,374 명, 선거인수는 9,606,870 명, 투표자수는 9,067,063 명, 투표율은 94.4% 였습니다.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에는 이기붕 내세웠고, 민주당에서는 신익희와 장면을 각각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선거 당시에는 아직 진보당이 출범하지 못한 관계로 진보당추진위원회가 후보로 세운 조봉암과 박기출은 각각 무소속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제3대 대선의 재미난 점은 처음으로 정당별 후보자 대결이 펼쳐지면서 선거구호가 처음 등장했단 것입니다.
야당인 민주당 쪽에서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구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짧고 압축적인 구호가 당시 자유당과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실망한 국민들 가슴에 와 닿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항해 자유당 쪽에서도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가러 봤자 더 못 산다' 등등을 내걸었지만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등장한 선거구호
당시에는 야외 선거유세와 연설회에 군중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는 여당보다 야당에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당 측에서는 민주당과 진보당으로 후보가 양립한 상황에서는 정권교체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야당 측은 후보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대통령은 조봉암 후보가 양보해서 민주당 신익희를 추대하고 부통령은 진보당의 박기출 후보를 내세우자는 절충안이 논의되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얼마 앞둔 5월 5일 무리한 유세 일정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돌연 사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당은 후보 단일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야당인 민주당은 진보당보다는 오히려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민주당은 기이한 선거전략을 짜게 됩니다. 무효표가 될 것이 확실한데도 죽은 신익희 후보에게 표를 던지라는 선거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보당 쪽에서는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도록 돕습니다.
투표소 풍경
제3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이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이승만은 504만 여표, 조봉암은 216만 여표를 획득했고 무효표가 185만여 표에 달했습니다. 무효표는 대부분 죽은 신익희 후보에게 던진 표였습니다. 조봉암의 표에 무효표를 합하면 거의 이승만이 얻은 표에 육박했습니다. 이승만의 사전선거운동과 엄청난 개표부정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조봉암 표의 맨 앞장과 끝에만 이승만 표를 넣어놓고 투표지 묶음 전부를 이승만 표로 처리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봉암은 "투표에서는 이겼지만 개표에서 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이승만은 55.7%를 득표했는데 무효표가 26.4로 였고 무효표를 제외하면 이승만의 득표율은 99.57%였습니다. 이 득표 기록은 이후에도 우리나라 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투표함 개함과 적재된 투표함
이번 선거에서는 또 네거티브 전략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승만은 조봉암 진보당 후보에게는 이념공세를 펼쳤고 민주당 신익희 후보는 친일파로 몰아붙였습니다. 당시 정부 요직에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 대거 등용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사던 이승만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본과도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주당 측 후보를 친일파로 모는 네거티브 전략을 쓴 것입니다.
개표상황표를 보는 군중들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제치고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진보당 조봉암의 위력을 실감한 이승만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선거 이후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극우 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장면 부통령과 같은 가톨릭계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결국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이던 조봉암을 제거합니다. 그렇게 이승만은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한 포석을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곧 자신의 몰락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