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을 통해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20만 여표 차이로 부통령에 당선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욱이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1956년 당시 만 81세였던 이승만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런 상황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게 장면 부통령은 상당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 대통령 선거 이후 얼마 안 있어 치러진 1956년 8월 두 차례의 지방선거에서도 지방에서는 압도적으로 자유당 후보자들이 당선됐지만 서울시 의원에서는 46석 중에 자유당은 1석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민주당 소속 의원이 42명이 당선됐고 나머지 의원들은 자유당 이름으로 나왔다가는 낙선할 것이 뻔하니까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것입니다.
3대 대통령 취임식과 장면 부통령
이런 상황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은 이승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이승만은 1956년 8월 15일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조차도 장면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놓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저격범이 쏜 총알은 빗나가 장면의 손등을 스쳐갔고 장면 부통령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저격범은 성동경찰서 사찰 주임의 사주를 받은 자였고 그 뒤에는 경찰 고위 간부들과 정부 각료들 있었습니다.
장면 부통령과 함께 이승만의 미움을 산 정치인은 바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진보당의 조봉암이었고 이승만 정권이 그를 그냥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1958년 1월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북한과 내통하여 북한과 유사한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일으킵니다. 1심 재판에서 조봉암은 권총 불법 소지죄로 5년을 선고받았지만 이승만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판사들로 채워진 2심 재판과 대법원에서는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인 1959년 7월 31일에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정권에 봉사하는 대법원 오욕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4.19 혁명으로 풀려났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관계자 공판 모습
진보당 사건으로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결로 축약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선거 직전에 제정된 민의원 선거법에 따라 후보자 기탁금 제도와 선거비용 제한제도가 도입되었고 회계보고 제도도 처음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선거 운동기간과 선거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가 도입된 것도 이때부터 입니다. 선거 결과 총 233개 선거구에서 자유당은 126명(54.1%)의 당선자를 내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했고, 민주당은 79명, 무소속은 27명의 당선자를 배출합니다. 그 이외에도 통일당에서 1명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전과 달리 후보자 난립현상이 대폭 감소함으로써 양당체제가 자리 잡게 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초선의 당선자가 112명이었던 것도 제4대 국회의원선거의 주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제4대 총선 투표소 풍경
한편 이번 선거는 곧 있을 3.15 부정선거의 예행연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대거 동원되었고, 경찰은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했습니다. 야당 참관인들이 각지에서 구타당했고 3인조 투표, 9인조 투표 등의 집단 투표도 난무했습니다. 이번 선거는 개표 도중 일부러 전기를 끄는 이른바 '올빼미 개표', 여당표 중간에 야당표나 무효표를 끼워 넣어 득표수를 조작하는 '샌드위치 표', 야당 참관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개표를 하는 '닭죽 개표' 등등 별의별 개표부정이 총망라된 선거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야당인 민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자 이승만 정권은 다음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서는 좀 더 과감하고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게 되고 그 결과 3.15 부정선거로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