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3ㆍ15부정선거’라 불린 최악의 선거였습니다. 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과 저항은 절정에 달했고 결국 4.19 혁명이 발생함으로써 이승만은 하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고 이기붕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제1공화국은 붕괴됩니다.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국회를 둘러싼 무장 경관들
제4대 대통령 선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선거 준비는 이미 195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54년 12월 24일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새로 채용한 무술경관들을 동원해 의사당에서 끌어내고 이른바 '신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킵니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정치적인 반대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제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정부가 선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지금까지 선출직이던 각 지방정부의 시, 읍, 면장을 임명제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정부에 비판적이고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 계열이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뒤 이승만은 선거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1959년 3월 '6인 위원회'를 만들어 국무위원 6명에게 선거와 관련된 사안을 직접 챙기도록 지시하고, 교통부 장관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고속 승진시켜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에 책임지고 나서도록 합니다. 최인규 내무장관 당시 공무원의 선거개입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15 부정선거를 위한 채비를 갖춘 뒤 이승만은 1959년 6월 29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게 합니다. 이런 조기 후보 지명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12월 21일 성명을 통해 내년 선거를 예정보다 앞당겨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당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던 야당이 선거를 위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없게 하려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상 5월에 치러졌던 대통령 선거가 3월로 앞당겨 실시됩니다.
자유당 전당대회
1960년 제4대, 5대 정부통령 선거에는 여당인 자유당에는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는 이기붕을 내세웠고, 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나섰지만 1960년 1월 조병옥은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서거하고 맙니다. 결국 야당인 민주당은 지난번 선거처럼 대통령 후보 없이 선거를 치러야 했고, 진보당의 조봉암도 이미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후여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적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선거 결과 88.7%를 득표하여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한편, 부통령 선거에는 자유당 이기붕, 민주당 장면 외에도 통일당 김준연, 여자국민당 임영신 등 4명이 출마하였지만 실제 구도는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유효투표수의 79%를 획득한 이기붕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조기선거 규탄대회와 조병옥 시신 운구행렬
그러나 공식 발표된 선거 결과인 이승만 88.7%, 이기붕의 79%는 중간에 부정투표로 인해 너무 득표율이 높게 나오자 이승만이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율을 더 낮춰서 발표하라고 지시한 결과였습니다. 어의없게도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총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오는 기현상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국민들은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아니라면 인기 없던 이기붕이 8백만 표로 장면보다 4배 이상을 득표한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지난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습했던 온갖 부정선거를 철저히 실행에 옮긴 결과였습니다. 4할 사전투표라고 해서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여당표 4할을 미리 투표함에 집어넣기도 하고 , 3ㆍ5인조 공개투표라고 해서 자유 당원들과 경찰이 선거인들을 3명 5명 등으로 조를 짜서 투표하게 하여 감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표소에 구멍을 뚫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다 알 수 있게 하는 등 비밀투표의 원칙은 깡그리 무시됐습니다.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이 이루어져 민주당에서는 이미 오전에 이번 선거는 불법선거 부정선거로 원천 무효임을 선언하고 선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4ㆍ19 시민혁명을 촉발하였고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립니다.
이승만 하야
단독 후보로 당선이 확실시되던 이승만은 왜 무리하게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지난번 선거처럼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면 당시 85세로 고령이던 이승만이 유고시 민주당이 집권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4.19. 혁명 과정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상세히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